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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행임록(掌議行任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872.4773-20150630.Y1532506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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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872
형태사항 크기: 36 X 2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임신년 8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장의행임록〉으로 장의직을 수행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한 문서이다. 총 109명이 등재되어 있으며 입격 4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재임된 이들이 있어 실제 장의직을 수행한 인물의 총원은 이보다 적다.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장의관련 인명부는 총 5책인데, 본 문서는 그 중 3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선 장의안 작성 후 6년 뒤인 1872년에 수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재된 인물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6년 전 작성된 장의안과 같이 주요 성씨의 분포와 유사한 인원분포를 보이고 있지만, 최, 장, 정, 안, 한씨가 새롭게 등재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872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행임록(掌議行任錄)으로 장의 109명의 인명을 기록한 것
자료의 내용
壬申年 8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掌議行任錄〉으로 장의직을 수행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한 문서이다. 총 109명이 등재되어 있으며 入格 4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再任된 이들이 있어 실제 장의직을 수행한 인물의 총원은 이보다 적다.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장의관련 인명부는 총 5책인데, 본 문서는 그 중 3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선 장의안 작성 후 6년 뒤인 1872년에 수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재된 인물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6년 전 작성된 장의안과 같이 주요 성씨의 분포와 유사한 인원분포를 보이고 있지만, 崔, 蔣, 鄭, 安, 韓氏가 새롭게 등재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掌議는 都有司, 有司 등과 함께 향교 운영에 실질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주요 校任으로 대개 도유사의 천거와 수령, 유림, 유생 등의 三望을 거쳐 교임으로 선출된다. 도유사가 鄕中凡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라고 한다면 향중의 대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실질적인 관리자는 장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의는 유림 중에서 地閥이나 덕행이 있는 자로 각별히 선출되며, 이들은 향교의 경제적 문제를 포함한 향교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하였던 실질적인 관리자였다. 조선 초기에는 교수 및 훈도가 지방향교에 파견되어 향교를 운영하게 하였지만, 17세기 이후 교수, 훈도직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향교의 임무 중 교육의 실질적인 임무가 쇠퇴하면서 더 이상 중앙으로부터의 향교 운영에 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리가 파견되지 않게 되자 수령의 관할 아래 향교 운영은 유생대표들이 맡게 되었다.
본 문서에 입록된 장의에 관한 사항은 다만 인명과 간단한 신상 만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에 장의의 임기나 해임 등과 관련된 내용에 관하여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각종 문건에 있어서도 장의와 관련된 별다른 사항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장의 선출과 체직기간 등에 관한 것이 일반적인 교임 관련 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본 문서가 작성된 19세기 후반에 향교는 더 이상 과거를 준비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다만 祭享儀禮에 국한하여 향촌사회의 예학을 유지하는 기구적 성격을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본 문서에 입록된 장의들도 제향과 관련된 행사에 주도적으로 실무를 담당한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가 작성된 직전의 장의안과 비교해 봤을 때 작성은 6년 만에 이뤄진 것으로 6년간의 장의의 명부라고 하기에는 많은 109명의 인명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장의의 임기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많은 인원수가 장의를 번갈아가며 혹은 교체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여타 향교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 시기 향교의 향촌유림의 공동체적 내지 향촌자치제적 성격이 점차 감소하면서 그 만큼 질적 저하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즉 18세기 중반 이후 校任은 다만 享祀만을 주관하는 명예직의 성격을 띠면서 그 역할수행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 문서에 등재된 장의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총 16개의 성씨로 金氏가 24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이어 朴 17명, 卞·禹 각 16명, 李 11명, 張 10명, 鄭 5명, 權 2명, 孫·康·羅·崔·蔣·丁·安·韓氏 각 1명씩이다. 앞선 장의안에 약간의 성관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또 다른 교임안인 도유사안을 비롯하여 향중 액내교생들의 명부인 청금록, 유안 등과 비교해 봤을 때 비안향교의 유력 성씨는 張, 卞, 金, 李, 朴, 禹氏 등으로 그 인적구성에는 변화가 없지만 위 6개의 성씨 중 김씨 세력이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입록자 수로 나타나며, 이외에 崔, 蔣, 丁, 安, 韓氏 등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어 19세기 중반 이후 비안향교에 참여하는 성씨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료적 가치
掌議는 都有司, 有司 등과 함께 향교 운영에 실질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주요 校任으로 도유사가 鄕中凡事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라고 한다면 향중의 대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실질적인 관리자는 장의였다. 본 문서는 이러한 장의직을 역임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비안향교의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본 문서에 등재된 장의들의 성씨는 총 16개의 성씨로 비안향교 여타의 교임안인 도유사안을 비롯하여 향중 액내교생들의 명부인 청금록, 유안 등에 입록된 이들의 절대다수와 그 구성을 유사하게 보이고 있다. 비안의 전통적 향촌유력 성씨는 張, 卞, 金, 李, 朴, 禹氏 등인데, 본 문서가 작성된 19세기 중반에는 이와 더불어 위 6개의 성씨 중 김씨 세력이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입록자 수로 나타나며, 이외에 崔, 蔣, 丁, 安, 韓氏 등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어 19세기 중반 이후 비안향교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성씨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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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八月日修正
掌議行任錄
掌議案
朴奎相
張仁欽
金學述
禹格謨
朴敏基
金達培
朴聖麟
崔性崙
金潤錫
金成鎭
禹承謨
金鑄成
禹弼謨
李文老
金顯祚
禹洛鎭
朴萬基
權載?
金仁秀
朴聖魯
金在誠
張聞鶴
鄭在南
卞海轍
張九鶴
金寓燁
卞敬秀
鄭在欽
禹東植
李元彬 改源彬
朴潤慶
禹昌植 入格
張光晦
金九成
朴鍾瀅
金鍾遠
張光殷
禹洛倫
李秀春
張軫壽
卞周?
金致正 改致任
金永根
金周哲
禹格謨 甲戌七月日差
金輔烈 入格
朴敏基
張周馹
金河九
朴斗老
金慶培
卞鐸秀
李錫龜
孫慶昌
朴甲壽
李泰老
丁在殷
卞芝秀 入格
張守漢
禹龍彩 丙子六月日差
鄭宅奎 丙子六月日差
禹亨植
朴錫魯
金濩成 改載裕
朴潤義
鄭基雲
朴寅秀
金鎭海 己卯正月日差
張守道
禹昌植
卞龍九
朴春祐
安允慶
李周善
李鍾文
權在謨
卞相?
卞道秀
張應燮
禹漢植
李能坤
金應玉
張正圭
朴容植
卞在奎
卞驥發
金學述
李圭穆
張光翼
朴魯奎
張正運
金在敏 入格
康俊植
朴尙玉
卞顯世
韓正秀
禹稷謨
卞?秀
金載裕
禹允植
金學來
鄭基弘
卞周?
李德坤
卞孝秀
卞周?
禹大演
李能坤
禹正演
李仁植
黃鍾五
金信運
白光哲
金致悌
尹吉成
張光殷
卞?秀
羅相璧
禹萬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