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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비안향교(比安鄕校) 도유사행임록(都有司行任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832.4773-20150630.Y153250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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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832
형태사항 크기: 34 X 25.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임진년 9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도유사행임록〉이다. 비안향교 도유사를 역임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하고 작성 당시의 생몰 여부 및 과거 합격여부 등을 기입하고 있다. 그 밖에 별다른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도유사의 체임기간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바가 없다. 총 139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약간 명의 중복이 포함되어 있다. 문서 서두에 작성연대 간지를 기록하고 있어 1832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832년에 작성된 비안향교(比安鄕校) 도유사행임록(都有司行任錄)으로 비안향교 도유사 역임자들의 인명을 기록
자료의 내용
壬辰年 9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도유사행임록〉이다. 都有司는 향교를 대표하는 校任으로 전 교임을 총괄하면서 교중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던 이들인데 본 문서에서는 이러한 비안향교 도유사를 역임한 이들의 인명을 기록하고 작성 당시의 생몰 여부 및 과거 합격여부 등을 기입하고 있다. 그 밖에 별다른 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도유사의 遞任기간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바가 없다. 총 139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약간 명의 중복이 포함되어 있다. 문서 서두에 작성연대 간지를 기록하고 있어 1832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담당한 이들은 나라에서 파견한 교수, 훈도 등의 교관이었고 그들은 향교의 원활한 역할 수행을 위해 교생 가운데에서 대표를 선발하여 향교의 운영을 돕도록 하였다. 선발된 이들은 堂長, 掌議, 有司 등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구성 자체는 성균관의 체제를 모방한 것이었다.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향교의 운영은 관학이라는 이유로 인해 지방 수령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지만, 실질적인 향교운영은 유생들의 대표들이 맡게 되었다. 이들을 총칭하여 校任이라고 하였으며 교임의 구성은 각 향교에 따라, 지방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영남지역의 향교 교임의 구성은 대체로 도유사, 장의, 유사체제가 일반적이었다.
교임의 首任을 도유사라고 하는데 장의와 더불어 향교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동재의 양반교임으로서 향교를 대표하고 운영을 총괄하였다. 비안향교의 교임 선발에 관한 사항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교임의 선출과 체직기간 등과 관련된 일반적인 사항은 여타의 향교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교임선출의 일반적인 모습은 향교의 대표적인 행사시에 獻官, 儒林, 儒生들의 천거로 수령에게 보고하면 수령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을 擇任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교임의 선출에 수령의 택임을 거치는 것은 향교가 관학이었기 때문인데 교임의 선출에 관의 영향력이 부분적으로 행사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수령의 결정은 대게 追認에 그치는 것이었고 어디까지나 유생들의 자치성에 더 큰 비중이 두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유사는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며, 전 교임을 총괄하면서 講習, 明倫을 비롯한 校中의 모든 大小事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유사라 하여 향교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독단적으로 결정, 실행할 수는 없고 모든 일은 장의, 유사 등 담당자와 상의하였으며 또한 이를 승인, 감독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교중에 중대한 일일 경우에는 유생들의 齋會에 부쳐서 처리하였다. 각 향교의 完議, 節目 등을 통해서 통상 도유사의 직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비안의 경우 그러한 문서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교중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교임 및 교생 등에 대한 임명, 감독, 처벌 등의 권한을 가졌으며, 釋奠祭, 朔望焚香 등 제례를 주관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 문서에는 인물에 대한 여타의 사항이나, 체직과 관련된 기간 등 여타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18세기 중반이후부터 교임의 임기가 크게 단축되고 있는 경향으로 봤을 때 본 문서에 등재된 도유사들의 체직기간도 1년을 넘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향교가 향촌유림의 공동체적 성격이 현격히 감소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만큼 교임이라는 직임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역량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졌다. 도유사를 비롯한 교임들은 단순한 명예직의 성격을 띠면서 점차 그 역할 수행이 제대로 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는 인명만이 기록되어 있어 언제부터 언제까지 역임한 도유사를 어떠한 순서로 기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기록된 인물들의 일면을 통해서 1832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초반의 비안향교 도유사의 인명을 기록한 문서로서 향교 기능이 현격하게 축소되는 시점에 도유사를 역임한 이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체직 기간이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많은 수의 인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향교의 교임의 사회적 역량과 실질적 성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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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九月日
都有司行任錄
都有司案 生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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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履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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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爀
金相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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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元
李寅馨
李光春
金相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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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 生員 金台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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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振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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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東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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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 李憲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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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弘燁 前名世燁
朴文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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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光益
朴慶祐
朴履基
金老? 知縣
金聲大
金振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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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邦碩
朴峙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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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守晃
張東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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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祈煥
張龍奎
李寅幹
金東學
朴大根
金東奎
朴潤元 生員
金致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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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馨度 改冕
金基洛
金昌厚
康錫侯
金昌宇
卞?祚
朴貞德 入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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