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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향교(商州鄕校) 분향록(焚香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82.4725-20150630.Y153210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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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상주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작성시기 1782
형태사항 크기: 32 X 23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안내정보

상주향교(商州鄕校) 분향록(焚香錄)
『분향록』은 1782년 10월부터 1785년 7월까지 상주향교(尙州鄕校)에서 매월 초하루(朔)과 보름(望) 거행된 삭망제(朔望祭)를 주관한 인물을 기록한 명단이다. 제례의 날짜와 종류 및 주관인물을 기록해 놓았다.
삭망제는 대체로 장의(掌議)와 재임(齋任)이 주관하였으며, 때로는 목사(牧使)와 같은 관료, 또는 개인 자격으로 제례를 주도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장의와 재임은 향교의 교임(校任)으로 향교운영의 실질적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본 자료외에도 상주향교에 남아있는 임원록(任員錄), 완의(完議) 등의 자료에 교임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당시 교임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교임은 향교의 수장인 도유사(都有司) 1인, 장의 2인, 재임 2인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향교는 유학(儒學)을 교육하는 지방의 유일한 관학(官學)이자 공자(孔子)와 선현(先賢)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유학의 상징처였다. 또한 향교는 지방의 양반사족이 모여 향중의 여러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양반사족들은 교임 또는 유생으로 향교에 출입하고 제례를 주관함으로써 향교의 운영 및 향론(鄕論)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실제 상주향교에 현전하는 교임관련 기록을 검토해 보면 대부분이 향안 및 서원안 등에서도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향안과 서원안의 입록은 양반사족임을 인정받는 것이며 이는 곧 교임이 상주의 양반사족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제례를 주도하는 교임 및 개인 가운데 서인계 인사가 다수 발견되는 점이다. 본래 상주는 퇴계학파(退溪學派)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었으나 17세기 후반 노론계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으며, 결국 영남에서 최초로 서인계 서원인 흥암서원(興巖書院)이 건립될 만큼 서인세력이 강성한 곳이었다. 이들 서인계 세력은 서원 뿐만 아니라 향교의 출입 및 제례의 주도에 적극적이었다. 상주 노론의 핵심인 창녕성씨를 비롯하여 다수의 노론계 인사들이 향교의 교임을 역임하거나 제례에 참여하고 있음을 『분향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상주향교의 삭망제를 주관한 교임 명부
내용 및 특징
본 자료는 壬寅年1782년 10월부터 乙巳年1785년 7월까지 작성된 문서로 매월 초하루(朔)와 보름(望)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祭禮인 朔望祭를 주관했던 인사들의 명부이다. 제례의 시행날짜와 종류를 기록한 후 주관인물의 官職名 또는 향교에서의 직책을 상단에 기록하고 성명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분향록』에 기록된 인사들을 살펴보면 매번 제례시 새로운 인물이 주관하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인물이 중복적으로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중복되는 경우를 제외한 제례 주관인의 수는 총 47명이다. 이들을 다시 성씨별로 구분해 보면 金氏 11명, 成氏 9명, 申氏 5명, 趙氏 3명, 宋氏 2명, 沈氏 2명, 安氏 2명, 李氏 2명, 洪氏 2명, 姜氏 1명, 權氏 1명, 柳氏 1명, 閔氏 1명, 朴氏 1명, 王氏 1명, 全氏 1명, 鄭氏 1명, 黃氏 1명이 확인된다.
삭망제는 가끔씩 牧使(金履信, 沈基泰) 또는 副護軍(李始喆)과 같은 관료가 주관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掌議와 齋任이 담당하고 있으며 이외에 上齋(都有司), 生員 등이 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 도유사, 장의, 재임은 향교의 校任으로 향교 운영의 실질적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본 자료외에 상주향교의 任員錄(1785~1800), 完議 등의 자료를 검토해 보았을 때 상주향교의 교임은 대체로 도유사 1人, 장의 2人, 재임 3人 체제였으며 이들은 상주의 유력 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제례의 대부분을 도유사, 장의, 재임 등과 같은 향교 교임이 담당하고 있는 것은 향교의 제례 기능과 깊은 관련이 있다. 1664년1671년상주향교에서 작성된 完議 가운데
一. 靑衿儒生으로 大祭에 두 번 불참자는 削籍하고 세 번 불참자는 黜한다.(甲辰完議) 一. 도유사는 매년 春 釋奠 때 傳受하고 翌年 春에 遞改한다. 布穀을 만약 未收, 未傳受 前에 分給이 있으면 從重施罰할 것.(辛亥完議) 一. 청금유생은 이름이 儒案에 있어 春秋大享外에는 한가지로 從事할 것이 없다. 近年 이래로 儒生이 모두 스스로 편리한 계획을 품어서 많이 참여하지 않아 執事가 매양 부족할 염려가 있으니 진실로 가히 한심하다. 두 번 불참, 세 번 불참에 대한 벌은 이미 前完議에 정해 있으니 지금부터 伊始하여 연고없이 한 번 불참한 자 및 單子再度不緊者는 官門 執事가 한차례 벌을 정할 것.(辛亥完議) 一. 春秋大祭時 饌酒를 관장하는 有司가 연고없이 불참할 때는 削籍할 것.(辛亥完議)
라는 규약에서 볼 수 있듯이 제례의 거행은 교임과 청금유생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주지하듯 향교는 교육과 제례의 기능을 동시에 가진 곳이었으나 조선후기 서원의 건립과 발달에 따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향교는 孔子의 위패를 모신 유학의 상징처이자 敎化의 중심지였다. 또한 제례 후에는 향교 운영의 책임자인 교임의 선출을 비롯하여 향중범사를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향교가 가진 위와 같은 중요성으로 인해 지역의 양반사족들은 교임 또는 청금유생으로 향교에 출입하며 각종 제례를 주관하였으며 이를 통해 향교의 운영 및 鄕論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본 자료가 작성된 18세기 후반의 경우 향안 및 서원안이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아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17세기~18세기 초반에 작성된 상주향교의 『駿焚錄』, 『焚香錄』, 『靑衿錄』등에 기록된 교임과 청금유생의 대다수는 鄕案 또는 書院案에 중복입록되고 있음이 확인되며 이는 당시의 교임이 양반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서인계 인사의 제례 주도가 활발해 지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 상주柳成龍을 배향한 道南書院이 창건된 곳이자 류성용의 문인인 鄭經世의 고향으로 퇴계학파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었다. 향교에서의 제례 또한 도남서원을 출입하던 남인계열 인사가 주도하고 있었음이 『駿焚錄』(1620~1625) 등의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정경세의 壻가 되어 상주와 인연을 맺은 서인계 山林인 宋浚吉의 영향과 영남내 자파세력을 부식시키기 위한 老論의 의도가 접목되어 상주에서는 점차 서인 세력이 확대되어 갔으며 결국은 영남에서 최초로 서원건립에 성공한 서인계 賜額書院인 興巖書院1702년에 창건되기에 이른다. 이에 상주는 영남노론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상주지역의 노론세력은 흥암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그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서원 뿐만 아니라 향교의 제례에도 개인 또는 교임의 자격으로 참여, 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분향록』에 기록된 姜世綸, 金濟默 등이 그 예로 상주 출신 강세륜(진주 강씨)은 문과 급제 후 掌令, 承旨, 司諫院 大司諫 등을 역임한 인물이자 1802년(純祖 2) 영남 남인을 물리치기 위한 疏를 올린 바 있는 노론계 인사였다. 김제묵(상산 김씨)은 1786년(正祖 10) 金尙憲을 제향하는 안동木石居遺墟祠(후의 西磵祠)를 서원으로 승격하고 사액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상주의 노론계 인사이다. 이들은 개인자격으로 제례를 주관하였다. 교임으로서 제례를 주도하는 경우는 창녕 성씨가 대표적이다. 창녕 성씨는 상주지역 서인계의 핵심인 成灠 계열로 다수의 교임을 역임하고 있다. 도유사를 역임한 成爾澤의 경우 宋時烈, 權尙夏의 문인인 成晩徵의 甥姪이며 이외에도 성람 계열로 보이는 8명의 교임 역임이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상주의 노론세력은 서원뿐만 아니라 향교의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으며 이는 교임의 역임, 제례의 주도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는 향교가 유학의 상징이자 향론 형성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분향록』은 이와 같은 당시 상주 지역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분향록』은 조선후기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제례를 주관한 인사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제례와 이를 주관한 교임의 구성, 그리고 상주지역 사족의 동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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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十月朔焚
香都有司 金延俊
齋任 成載烈
同月望焚
香掌議 申光五
齋任 成■
十一月朔焚
香掌議 申光五
齋任 成載烈
同月望焚
香掌議 申光五
成龜柱
齋任 成載烈
十二月朔焚
香都有司 金延俊
成龜柱
同月望焚
香掌議 申光五
癸卯正月焚
香掌議 申光五
同月望焚
香都有司 金延俊
齋任 成載烈
金志約
二月朔焚
香掌議 申光五
齋任 成載烈
同月望焚
香掌議 申光五
三月朔焚
香都有司 金延俊
同月望焚
香掌議 申光五
四月朔焚
香掌議 成龜柱
同月望焚
香掌議 申光五
齋任 成載烈
五月朔焚
香齋任 金濟大
同月十三日
申光集 帶恩謁

同月望焚
香都有司 成天柱
掌議 沈彙賢
齋任 洪龍慶
同月二十二日
姜世綸 帶恩謁

六月朔焚
香掌議 安正履
沈彙賢
齋任 金濟大
同月望焚
香掌議 安正履
沈彙賢
齋任 洪龍慶
同月十九日
洪居聖 帶恩謁

同月二十三日
申馥 帶恩祗謁

七月初一日焚
香掌議 安正履
沈彙賢
齋任 金濟大
洪龍慶
生員 金濟默
同月望焚
香掌議 安正履
沈彙賢
齋任 金濟大
洪龍慶
八月朔焚
香掌議 安正履
沈彙賢
齋任 金濟大
洪龍慶
同月望焚
香掌議 安正履
沈彙賢
九月朔焚
香掌議 安正履
齋任 洪龍慶
同月望焚
香掌議 沈彙賢
十月朔焚
香都有司 成天柱
齋任 洪龍慶
同月望焚
香掌議 金有恒
沈彙賢
十月月朔焚
香新榜進士 安正履
掌議 沈彙賢
同月望焚
香都有司 成天柱
掌議 金有恒
齋任 洪龍慶
趙錫虎 帶恩謁

十二月朔焚
香都有司 成天柱
掌議 沈彙賢
齋任 洪龍慶
十二月望焚
香都有司 成天柱
掌議 金有恒
齋有司 宋志博
甲辰正朝焚
香掌議 金有恒
同月初八日
李德鉉 帶恩謁

同月望焚
香掌議 沈彙賢
齋任 宋志博
洪龍慶
同月十八日
副護軍 李始喆

權思浹 帶恩謁 同月二十二日

同月二十五日
閔光迪 帶恩謁

二月初五日
黃載保 帶恩謁

同月初四日
全日欽 帶恩謁

同月望焚
香掌議 金有恒
沈彙賢
三月朔焚
香齋任 宋志博
成爾湙
同日
牧使 金履信

三月望焚
香掌議 沈彙賢
閏三月朔焚
香掌議 金有恒
齋任 朴明曄
同月望焚
香齋任 宋志博
四月朔焚
香掌議 宋志博
齋任 柳祥杓
四月望焚
香掌議 宋志博
五月朔焚
香掌議 宋志博
齋任 柳祥杓
五月望焚
香掌議 宋志博
六月朔焚
香都有司 成天柱
掌議 沈彙賢
齋任 柳祥杓
六月望焚
香都有司 成天柱
掌議 宋志博
甲辰七月朔焚
香齋任 成若烈
進士 安正履
幼學 金濟凝
生員 金濟默
金益顯
同月望焚
香掌議 成夏烈
金益筠
齋任 成若烈
八月朔焚
香掌議 成夏烈
同月望焚
香掌議 成夏烈
金益筠
九月朔焚
香上齋 安正履
掌議 金益筠
齋任 金恒俊
金仁學
同月望焚
香掌議 金益筠
十月朔焚
香掌議 成夏烈
金益筠
同月望焚
香上齋 安正履
掌議 金益筠
成夏烈
十一月朔焚
香上齋 安正履
掌議 成夏烈
十二月朔焚
香上齋 安正履
鄭允中 帶恩謁

同月望焚
香掌議 成夏烈
齋任 申兢然
乙巳正月朔焚
香掌議 成夏烈
同月望焚
香上齋 安正履
掌議 成夏烈
金益筠
齋任 申兢然
二月朔焚
香掌議 金益筠
齋任 趙俊臣
二月望焚
香掌議 金益筠
齋任 趙俊臣
同月二十二日
王允澤 帶恩謁

三月望焚
香掌議 成夏烈
齋任 趙俊臣
趙載垕
同月二十三日
牧使 沈基泰

四月朔焚
香齋任 宋煥綱
同月望焚
香都有司 成爾澤
齋任 宋煥綱
五月朔焚
香掌議 成七柱
齋任 宋煥綱
安昌國
同月望焚
香掌議 成七柱
申榏
齋任 安昌國
宋煥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