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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69.4725-20150630.Y1532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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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함창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작성시기 1769
형태사항 크기: 28 X 22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39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안내정보

1769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1769년에 작성된 경상도 咸昌縣 鄕案이다. 함창향교에 소장된 본 향안은 291명의 향원을 수록하고 있으며 겉표제는 鄕案正錄이며 속표제는 咸昌鄕案으로 적혀 있고 좌목에는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조선후기 재지사족들은 향안에 입록함으로써 향론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에 입록자의 현황을 통해 당시 지역 여론을 주도했던 세력을 파악 할 수 있다. 본 향안에는 18개 성씨가 확인되며 仁川蔡氏, 完山李氏, 平山申氏, 宜寧南氏, 缶林洪氏, 晉州柳氏, 安東權氏 순이다. 기존 17세기 향안 입록자의 가문 분포와 크게 다르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이들 가문이 여전히 18세기에도 함창의 향론을 주도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입록자 중 관직과 職役을 가진 자는 8명 뿐이며 관직과 관품의 종류는 5개로 확인된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韓國의 鄕校硏究 』, 강대민, 경성대학교출판부, 1992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69년에 작성된 경상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1769년에 작성된 경상도 咸昌縣 鄕案으로 함창향교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함창향교에는 모두 7종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향안들은 다소 중복되거나 연대가 비슷한 것이 있으나 舊案·加錄·座目·繼錄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중 咸昌鄕案이 제목인 본 자료는 겉표지에는 鄕錄正案이라 표시되어 있다.
조선후기 임진왜란을 거치면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은 현전하는 자료 중 복구되는 1607년 이후 1691년, 1748년 이어 4번째 작성된 향안이다. 본 향안의 좌목은 본관, 字號, 생년간지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향안 입록자 291명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채씨 62명, 이씨 50명, 申氏 36명, 남씨 27명, 홍씨 25명, 柳氏 24명, 권씨 20명, 강씨 10명, 鄭氏 9명, 박씨 8명, 곽씨 7명, 김씨 4명, 趙氏 3명, 성씨 2명, 문·송·안·장씨 각1명으로 총 18개 성씨가 나타난다. 채씨가 가장 많으며 이씨, 신씨, 남씨, 홍씨, 류씨, 권씨 7개 성씨가 84%를 차지하고 있어 이들 성씨가 조선중기 이래 유향소를 중심으로 함창의 향촌사회를 주도하던 대체적인 성씨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성관은 仁川蔡氏,完山李氏, 平山申氏, 宜寧南氏, 缶林洪氏, 晉州柳氏, 安東權氏 등으로 모두 邑誌類에 기재되어 있는 함창의 土姓이 아닌 來性들이다.
특히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인천채씨는 함창 恭儉池 부근에 농장을 개설하여 蔡壽를 비롯하여 여러 현달한 인사를 배출한 관내 가장 유력한 가문이었다. 이들 중 관직이나 관품을 보유한자는 총 8명 뿐이며 관직과 관품의 종류는 5개로 확인되는데 이는 17세기 향안보다 그 비율이 매우 낮은 수치다. 이는 외적으로는 인조반정 이후 노론 전제정권에 따른 재지사족들의 중앙 관료 진출이 어려워지는 추세와 내적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운영되던 향안 권위의 약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도내 다른 향안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요 관직을 나열하면 正字·主書·城主 각1명, 職役 進士 3명, 生員 2명이다. 문과급제자인 主書 柳熽持平南必錫병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향안 말미에는 1769년‘崇情紀元後三己丑三月二十日’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鄕任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료적 가치
본 향안은 18세기 중반 함창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작성된 향안은 18세기 들어서면 향안 입록자 수가 격증하고 향안이 파치되는 시기이다. 본 향안도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것으로 이러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18세기 향안 입록 기준이 완화되면서 본 향안의 입록자 수도 격증하여 291명에 이르지만 7~8개 주요 가문에서 거의 모두 향원이 배출되는 점은 기존 향촌 질서를 일정하게 반영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존의 향안 입록자의 가문 분포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이들 가문이 여전히 17세기에 이어 18세기에도 함창의 향론을 주도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 관직 내지 관품자의 비율은 극히 낮게 나타나는 점은 18세기 함창지역 재지사족들이 거의 仕路 진출이 없었음을 말해주거나 향안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김인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鄕錄正案

咸昌鄕案
加錄
趙廷瑗【城主】
申{金+奏}
宋光漢
申華岳 
權朝彦

洪彙吉
洪泰吉
洪師吉
洪濬吉
洪獻吉
洪鶴吉
洪胤祖

洪胤東
洪胤寧
洪弼夏
洪以績
洪宗海
洪汝績
洪纘績

洪景績
洪龍績
洪萬績
洪冑顯
洪冑大
洪冑聖
洪宗宇

姜宅權
鄭八復
鄭八起
李東春【生員】
李東著
李東晉
李東五

朴溥吉
朴尙懋
鄭啓熙
張弼漢
李再燦
柳宜和
柳宜濂

柳以燦
柳以燮
柳淙
柳極彩
柳穆彩
柳濩
柳濤

柳極培
李德運
李德遠
李德建
李德獜
李德燦
李琩

李講
權杓
權稷
權樞
權檍
權聖槼
權聖沐

權榏
權櫓
權㯙
權{木+卨}
權聖濂
權聖錘
金徽

金以基
金殷相
權說
權誡
權詗
蔡瑞國
蔡理

蔡蓍文
蔡均
蔡蓍元
李齊泰
李齊鳳
李齊心
李齊參

李齊翼
李器玉
李完玉
李邦玉
李齊范
李齊穆
李齊弼

李齊和
李齊璧
李挺玉
李元玉
李顯玉
李相玉
李明玉

李齊喆
李齊漢
李仁玉
李如玉
李衡玉
李身玉
李承孝

南鼎興
南必奎
南必箕
南必斗
南必璧
南漢儒
南漢老

南漢柱
南鼎肈
南必曇
南必晃
南宗英
南宗烈
南必燁

南必獜
南必錫【正字】
南漢朝
南宅夏
南宅亮
南達運
南周運

南必宗
南必駿
南鼎燁
南必良
南必敎
姜世忠
姜世孝

姜世文
姜世濟
姜必憲
姜必遜
姜必晉
姜穆欽
申思九

安國輔
李世陽
李致陽
李起陽
朴尙溫
洪翰東
鄭漢紀

柳得培
柳亨源
柳以爀
柳以恒
柳以默
柳一源
柳幹

柳熽【主書】
柳楫
柳梡
柳樑
柳{木+奭}
柳和源
柳栐

文必成
朴良吉
朴遇吉
洪聖龍
洪學再
蔡琦
李{宀+湜}

李處埏
李處坤
李處垠
李處埻
姜洽
李海朝
趙榮宗

申光兌
申光業
申栠
申楫
申俊
申榘
申棐

申光宅
申尙夔
申尙履
申尙說
申尙穆【生進】
申尙集【進士】
申尙宲

申尙羲
申紹陽
申鳳陽
申德陽
申復陽
申儻
申確然

申德增
申復泰
申業
申果
申{亻+政}
申光麗
趙宗林

申宅明
朴遇春
朴再春
朴重吉
蔡德明
蔡德中
蔡希聖

鄭泰元
鄭東杓
鄭泰春
鄭東楫
鄭東權
申宅和
申宅揆

蔡膺漢
蔡克大
蔡禹大
蔡必大
成宙烈
成宅烈
蔡景靖

蔡瑍
蔡德龍
蔡德基
蔡信轍
蔡景游
蔡東轍
蔡景溫

申宅夏
蔡景極
蔡景寶
蔡景獻
蔡景九
蔡景曾
蔡膺河

蔡景涑
蔡蓍轍
蔡羲轍
蔡文轍
蔡獻轍
蔡亨大
蔡成大

蔡蓍漢
金熙啓
蔡衡國
蔡德元
蔡光國
蔡翰國
蔡憲國

蔡德必
權榥
權檏
權宗燮
洪彙績
郭文鳳
郭文郁

郭文憲
郭文命
郭文五
郭文九
郭萬冑
蔡德淵
蔡信國

蔡{沂+王}
蔡{沉+王}
蔡德濬
權璞
蔡{瀣+王}
蔡德濟
蔡德洙

李潗
李仁宅
李濟
李瑎
蔡德濡
蔡蓍老
蔡蓍朝

蔡蓍祥
蔡淳
蔡沃
蔡鼎龍
蔡寅龍
蔡{氵+奭}
蔡濯

蔡漝
蔡蓍昌【生員】
蔡蓍德
申尙稷【進士】
申赫然
南必周

崇禎紀元後三己丑
三月二十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