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9년에 작성된 경상도 함창현(咸昌縣)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1769년에 작성된 경상도 咸昌縣 鄕案으로 함창향교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함창향교에는 모두 7종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향안들은 다소 중복되거나 연대가 비슷한 것이 있으나 舊案·加錄·座目·繼錄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중 咸昌鄕案이 제목인 본 자료는 겉표지에는 鄕錄正案이라 표시되어 있다.
조선후기 임진왜란을 거치면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은 현전하는 자료 중 복구되는 1607년 이후 1691년, 1748년 이어 4번째 작성된 향안이다.
본 향안의 좌목은 본관, 字號, 생년간지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과 관직 또는 관품만을 기재해 두고 있다.
향안 입록자 291명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채씨 62명, 이씨 50명, 申氏 36명, 남씨 27명, 홍씨 25명, 柳氏 24명, 권씨 20명, 강씨 10명, 鄭氏 9명, 박씨 8명, 곽씨 7명, 김씨 4명, 趙氏 3명, 성씨 2명, 문·송·안·장씨 각1명으로 총 18개 성씨가 나타난다. 채씨가 가장 많으며 이씨, 신씨, 남씨, 홍씨, 류씨, 권씨 7개 성씨가 84%를 차지하고 있어 이들 성씨가 조선중기 이래 유향소를 중심으로 함창의 향촌사회를 주도하던 대체적인 성씨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성관은 仁川蔡氏,完山李氏, 平山申氏, 宜寧南氏, 缶林洪氏, 晉州柳氏, 安東權氏 등으로 모두 邑誌類에 기재되어 있는 함창의 土姓이 아닌 來性들이다.
특히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인천채씨는 함창 恭儉池 부근에 농장을 개설하여 蔡壽를 비롯하여 여러 현달한 인사를 배출한 관내 가장 유력한 가문이었다.
이들 중 관직이나 관품을 보유한자는 총 8명 뿐이며 관직과 관품의 종류는 5개로 확인되는데 이는 17세기 향안보다 그 비율이 매우 낮은 수치다. 이는 외적으로는 인조반정 이후 노론 전제정권에 따른 재지사족들의 중앙 관료 진출이 어려워지는 추세와 내적으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운영되던 향안 권위의 약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도내 다른 향안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요 관직을 나열하면 正字·主書·城主 각1명, 職役 進士 3명, 生員 2명이다. 문과급제자인 主書 柳熽는 持平에 南必錫은 병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향안 말미에는 1769년인 ‘崇情紀元後三己丑三月二十日’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鄕任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료적 가치
본 향안은 18세기 중반 함창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작성된 향안은 18세기 들어서면 향안 입록자 수가 격증하고 향안이 파치되는 시기이다. 본 향안도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것으로 이러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18세기 향안 입록 기준이 완화되면서 본 향안의 입록자 수도 격증하여 291명에 이르지만 7~8개 주요 가문에서 거의 모두 향원이 배출되는 점은 기존 향촌 질서를 일정하게 반영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존의 향안 입록자의 가문 분포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이들 가문이 여전히 17세기에 이어 18세기에도 함창의 향론을 주도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 관직 내지 관품자의 비율은 극히 낮게 나타나는 점은 18세기 함창지역 재지사족들이 거의 仕路 진출이 없었음을 말해주거나 향안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 김인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尙州誌』, 상주시, 1989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