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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유안(儒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67.4773-20150630.Y15325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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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767
형태사항 크기: 33 X 27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1767년 8월 6일에 작성된 비안향교 〈유안〉으로 문두에 ‘동재유안’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들이 동재유생임을 밝히고 있다. 문서 말미에 ‘정해’라고 하여 그 작성연대를 알 수 있고, 도유사 1인, 장의 2인, 재유사 1인, 당장 3인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입록자는 모두 115명인데 입록된 이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김씨가 24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이어 이 20명, 장 19명, 변 16명, 박 13명, 정 9명, 류, 권 각 4명, 우, 남, 신씨가 각 1명씩이다. 비안향교는 현으로 30명의 정액이 있었지만 향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기에 등재자가 격중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67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유안(儒案)으로 '동재유안(東齋儒案)'이라고 기록하여 액내유생을 기록한 것
자료의 내용
1767년 8월 6일에 작성된 비안향교 〈儒案〉으로 문두에 ‘東齋儒案’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들이 동재유생임을 밝히고 있다. 문서 말미에 ‘丁亥’라고 하여 그 작성연대를 알 수 있고, 도유사 1인, 장의 2인, 재유사 1인, 당장 3인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입록자는 모두 115명인데 비안향교는 현으로 30명의 定額이 있었지만 향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기에 등재자가 격중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교생은 양반의 子弟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입학이 허락되었으나 신분에 따라 양반은 액내교생이 되었고, 평민 및 서얼층은 액외교생이 되어 서로 구별되어 있었다. 인조대에 교생 考講이 시행되자 양반들은 액내교생으로서의 入學을 회피하였고 양반들은 고강이 면제되는 成均館, 四學을 모방하여 동재유생이라고 이름하고 별도로 靑衿錄을 작성하여 교생과 구별하려 하였다.
비안의 경우 임진왜란으로 불탄 향교를 다시 건설하고 士族중심의 향촌질서의 강화, 향리계층에 대한 제어, 관권으로부터 향권의 보호 등의 필요성에 의해 재지사족 권위의 상징인 儒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현전하는 비안의 유안은 총 5책으로 1664년에 작성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액내교생 35명이 입록되어 있다. 그 후 2~3년에 한번씩 유안을 작성하였는데, 1667년에 33명, 1669년 30명이 입록되다가 1700년에는 19명 만이 입록되고, 본 문서가 작성된 1767년에는 갑자기 115명으로 등재자가 급등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안 작성이 비정기적으로 실시된 것인지, 불필요에 의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비안향교에서는 18세기 초반부터 청금록이 작성되고 있어 유안 작성에서 청금록 작성으로 변화하는 新鄕의 대두 및 분란 등과 관련하여 향촌질서 복구의 움직임이 두드러진 결과로 보여진다.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의 유안은 향교교생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청금록에 입록된 청금유생들을 구분하여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비안의 청금록 중 18세기 초반에 작성된 문서에 드러나는 청금유생의 인원이 108명인 것과 비교하면 본 문서의 표제어는 유안이지만, 청금록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 하겠다.
본 문서에서는 유생들의 인명만을 기록하고 있어 비안의 유안 입록 및 추록, 심사과정 등에 대해서 어떠한 규정이 적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입록된 이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金氏가 24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이어 李 20명, 張 19명, 卞 16명, 朴 13명, 鄭 9명, 柳, 權 각 4명, 禹, 南, 申氏가 각 1명씩이다. 각 유안에 입록된 이들 중 전통적으로 꾸준한 분포를 보이는 대표적인 성씨에는 변동이 없으나 柳氏의 입록이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인적구성은 향교의 교임인 都有司와 掌議 관련 문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향교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인 교임의 구성도 본 유안에 입록된 인적구성 분포와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어 본 문서가 작성될 18세기 중반의 비안향교의 주도세력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향교의 주요 임무인 교육의 기능이 쇠퇴한 시점이었지만, 각종 祭禮의 獻官을 담당하면서 향교의 보호와 기능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향촌기구로서 향촌사회 대변기관에 참여하여 향교를 그들의 주도적 영향력 하에 두려 했던 주요 성씨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중반에 작성된 문서로 당시 비안 지역의 향촌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성씨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비안의 경우 향촌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각종 명부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라 본 문서를 통해 재지적 기반을 가진 비안지역 성씨의 변화양상을 단편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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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校
東齋儒案
李陽宅
卞坤
李光琢
南正龜
李光潤
鄭師聖
權輯
卞光國
李達濟
張鴻翼
李培信
張再良
金兌一
卞瓚
卞基
李培德
張晙
金光涑
卞城
金光洛
李陽權
張再?
朴天啓
金泰魯
權較
金浚
權潗
李陽重
李演
金鎭圭
鄭師玄
朴天健
鄭師虎
張曄
金龍五
金義一
卞?
金光涉
金光德
卞之熙
張泰國
朴天擎
朴鳳鳴
張大鳳
鄭師康
張泰東
朴天儉
金洙
李光輔
李益彬
金涉
朴天普
卞瑀
李培益
李陽玉
鄭師俠
金澈
朴天柱
金光潗
鄭泰河
金尙玉
金龍五
卞?
卞埰
金載道
張再玉
卞壕
柳{火+采}
張?
朴天復
金載鳴
柳觀華
李培道
李涵
張大倫
李光德
申光益
卞珀
金相益
卞之勳
李培仁
朴天行
張孝源
申壽星
金景海
鄭師文
張泰晨
朴天輪
張暾
柳煉
張暾
金載積
禹再文
金載光
鄭師鑑
張再浚
朴天仁
張再封
卞?
李泳
申光彦
卞夏鎭
朴天緯
張孝百
卞東鎭
張旭
李陽潤
朴光輔
鄭好仁
李光鍊
權復經
金載文
辛應聲
金相宅
柳宗慶

李培信
李危潤
堂長 李益曄
齋有司 張再封
朴天啓
掌議 卞坤
丁亥八月初六日 都有司 李光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