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765년 예안향교(禮安鄕校) 유안(儒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65.4717-20150630.Y1521703048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예안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65
형태사항 크기: 31 X 22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현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65년 예안향교(禮安鄕校) 유안(儒案)
본 자료는 1765년 2월 예안향교에서 작성된 유안이다. 유안은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일종의 학생명부로 입록인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신분에 따른 것으로 예안향교에서 액내, 별유는 양반사족으로, 액외와 교생은 중서층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예안향교의 교안은 일반적인 교안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다. 타지역의 경우 사족만의 안으로 청금록이 작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향교는 지역의 관학으로 공자의 위패를 모신 유학의 상징이자 교화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교생에게는 군역의 면제, 무상교육, 하급관리로의 진출 기회 부여 등과 같은 각종 특혜가 주어졌고 고을의 대소에 따라 교생 수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정원내의 교생을 액내교생이라 하였고, 양반사족들은 액내교생으로 입교하여 향교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 이외에 일반 양민층은 액외교생으로 입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교생의 특혜를 누림과 동시에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하고자 하는 상층양민의 향교진출이 활발해지고 정부에 의한 일괄적인 교생 통제책이 실시되자 양반사족들은 더 이상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지 않고 그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 지속적으로 향교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액내와 액외는 양민층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고 양반사족들은 기존의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여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일반 양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향교진출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양반사족들이 교안이 작성된 조선후기까지 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1765예안향교의 생도를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이 자료는 乙酉年(1765) 春, 禮安鄕校에서 작성된 儒案으로 당시 예안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일종의 학생명부이다. 본 자료 외에도 1620년부터 1776년까지의 생도안이 현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후기 예안향교의 인적구성 및 예안지역 士族의 동향을 확인할 수 있다.
예안향교의 생도안은 본 자료명인 유안 외에 校案이라는 명칭으로도 작성되었다. 일반적인 연구에서는 유안을 사족의 案으로, 교안을 중서층의 안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예안의 경우 두 안의 신분적 차이는 없으며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현전하고 있는 예안향교의 생도안은 대체로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2월과 8월에 작성되는 것이 보통이며 본 자료가 작성된 1765년에는 2월 봄에 한 번 작성되었다. 작성방식은 우선 향교의 생도를 額內, 別儒, 額外, 校生으로 구분하여 성명을 기재하였으며 성명 하단에 在喪, 移居 등과 같은 신변사항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작성날짜와 수령의 수결이 있다. 이러한 작성방식은 본 자료 외에도 대체로 동일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유안의 구체적인 입록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총 입록인의 수는 248명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액내 31명, 별유 199명, 액외 3명, 교생 15명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성씨별로는, 액내의 경우 李氏 13명, 金氏 9명, 朴氏 3명, 柳氏 2명, 南氏 2명, 吳氏 1명, 申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별유의 경우 李氏 69명, 金氏 59명, 琴氏 23명, 尹氏 8명, 朴氏 7명, 申氏 6명, 權氏 5명, 許氏 4명, 吳氏 3명, 南氏 3명, 禹氏 3명, 任氏 3명, 趙氏 2명, 潘氏 1명, 安氏 1명, 鄭氏 1명, 宋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액외의 경우 南氏 2명, 金氏 1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교생의 경우 尹氏 3명, 申氏 3명, 南氏 3명, 李氏 2명, 金氏 2명, 琴氏 1명, 沈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예안향교 유안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입록인의 신분에 따른 것으로 예안향교에서는 입록자격에 관련한 完議를 작성한 바 있다. 1661년의 「校案改修正時完議」가 그것으로, 완의에서는 유생 가운데 士族으로 액내 30명을 입록하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별유로 옮겨 입록토록 하였다. 별유로의 입록 후 액내의 궐원은 신참인이 채우도록 하였다. 별유의 경우 정액은 없으며 액내를 지냈거나, 書院에 참여한 경우 입록토록 하였다. 그리고 액내와 별유 가운데 齋儒司, 掌議 등의 校任을 선출토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사족에 의한 독점적 향교운영을 도모한 것으로 이해된다.
액내와 별유가 사족으로 구성되었음은 입록성씨의 분석에서도 확인된다. 위의 입록상황에서와 같이 이·김·금·윤·박씨 등은 본 자료 뿐만 아니라 교안이 작성된 전 시기에 걸쳐 입록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며 예안 사족의 명부인 禮安鄕錄의 입록에 있어서도 입록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다. 예안향록의 작성이 1717년에 중단됨에 따라 본 자료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이전의 비교 가능한 교안의 경우 액내·별유 입록인의 상당수가 향록에 중복 입록하는 경향이 확인된다. 즉, 액내와 별유는 예안의 사족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액외와 교생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완의에서 규정된 바 없다. 일반적인 향교 연구에서 액외의 경우 정액 외의 생도로 교생과 마찬가지로 신분상승 및 避役을 위해 불법 투속한 중서층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액외는 시기에 따라 신분의 변화가 있었다. 1687년 이전의 경우 액외의 상당수가 향록에도 동시에 입록되고 있으며 동일인이 액내, 액외, 별유를 이동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즉 1681년까지의 액내, 별유, 액외는 사족층으로 구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87년을 기점으로 액외와 향록과의 연관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액내·별유와 액외간 이동이 중단된다. 또한 賤役이였던 水軍에 차정되기도 하였던 교생과 액외간의 이동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았을 때 1687년 이후의 액외는 교생과 마찬가지로 중서층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본 자료가 작성된 1765년 역시 위에서 설명한 신분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액내와 별유는 사족으로, 액외와 교생은 중서층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안향교 생도의 이러한 신분적 변화는 타지역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靑衿錄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중서층의 지위상승과 避役을 위한 교안 입록이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이들의 향교진출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중앙에 의한 일괄적인 교생 통제책인 校生考講이 시행되자 사족들은 더 이상 교생으로의 입교를 회피하였다. 대신 사족들은 그들만의 명단인 靑衿錄, 또는 儒案을 작성하여 향교운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안에서는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으며 사족들은 18세기 후반까지 액내와 별유로의 입록을 통해 향교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곧 그만큼 당시 예안사족의 향교장악력이 조선후기까지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1765예안향교의 교안으로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것이다. 교안을 통해 당시 예안향교의 인적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향교와 지역 사족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

이미지

원문 텍스트

乙酉
鄕校儒案
額內
金垕
李世源
李重凞
金緖
南聖龜
金容復
柳{氵+芫}
朴師天
李世命
李龜命
李世翊
南夏燮
金應鑑
李震英
李世芳
金奎
朴師尹
吳命耈
李世翕
金絅
李世麟
李廷采
朴命新
柳聖鵬
李世劤
李廷楷
申致龍
金▣(嶙)
金時潤
李龜星
金應淵
別儒
李世鐸
金重玹
李宅吉
金泰源
李重休
許樞
李鐸
金行源
李宗煥
金應鑌
金杞 己(?)
琴泰躋
申正義
金聖燦
李世敬
李龜宗
琴景魯
李世迪
李龜敬
吳命時
金應世
金相玉
金楨
李世執
金龍翼
金潤玉
金欽
金重璧
申祥龍
李龜齡
金天紹
金瑩
金垍 在喪
李世赫
李廷翰
南瑞龜
琴鼎錫
李震燁
金聖執
南世龜
李廷憲
金師舜
李鎭宅
金良佐
李龜叙
琴友磬
禹相華
金鐸
朴師賢
李重勛
趙相彬
禹繼華
尹一徵
琴大復
潘宗洙
琴溥澤
金應鑌 疊書
金樘
尹麒徵
李世立
李龜禹
金萬翼
金(??)
金樸
李世淑
金尙{火+集}
李鎭漢
金應南
朴師元
任象辰
申正宗
李仁育
金應源
朴命運
李師憲
金英秀
朴師德
李濟臣
李仁必
金鳴玉 疊書
李廷檀
趙榮宅
權處仁
李濟龍
尹成徵
金啓玉
李廷翼
李龜祿
李樟 在喪
琴性溫
金仁元
李世春
南應龜
申正觀
琴胤錫
李益駿
金振玉
朴師道
安思黙
金良漢
琴哲心
金枝玉
許爀
李震爀
李廷龜
朴震秀
申正圭
琴景伋
李龜游
琴景禹
琴景舜
金必龍
琴宗漢
琴宗澈
申聖烈
李世徽
金尙慶
尹大徵
權尙平
金涬
李世發
金天憲
琴大亨
金聖鍊
許栽
琴冑錫
李祥熻
李學培
李重觀
李龜報
李銖
李鎔
李龜蒙
金朝翼
李世光
金凞卨
朴師騫
李世靖
李世直
李銘
尹遇徵
李廷輔
李廷龍
金聖振
尹複
尹昌徵
金廷玉
李震煜
尹祗
李廷桷
金南復
金斗鍊
權龍天
金順源
權重信
李宗煜
任象樞
吳命欽
許煜
金應東
吳命玉
金南翼
李鎭海
金宗元
李廷吉
李元吉
金之翼
金聖元
金天漢
琴宗潤
琴宗濬
金{土+寬}
金{木+奕}
任象貞
金匡翼
李龜容
李龜賓
李龜明
李龜紹
金龍漢
李學時
李鎭璧
李廷觀
琴錫魯
金應鉉
金䵺
琴友舜
權敬天
琴性眞
禹翊華
李鎭慶
琴益躋
李師儒
李宗秀
琴大紹
李益吉
李宗爀
鄭光魯
宋國相

額外
南錫薰
金泰一
南宅薰
校生
琴友張
尹德元
金鳳就
沈孟聃
尹一運
尹一大
李恒錫 移居安東
南泰明
南國明
李永福
申應壽
申應福
南運發
申聖徵
金萬宗

官 [手決]
乙酉二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