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6년 상주목에서 작성된 향안
내용 및 특징
『鄕案加錄草』는 丙子年 3월 尙州牧에서 작성된 鄕案이다. 加錄의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일반 鄕員과 鄕任, 會員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입록인의 성명을 기록하고 상단에는 관직명, 향임직, 職役 등을, 하단에는 改名 여부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이 자료의 작성연도인 丙子年은 입록인의 구체적 분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입록인 가운데 前參奉 成爾漢은 1689년(肅宗 15)생으로 1726년(英祖 2) 丙午 式年試에 進士가 되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병자년은 1756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鄕案加錄草』에서 刀割할 9명을 제외한, 실제 확인 가능한 입록인원은 총 132명이다. 이 가운데 일반 향원이 115명이며 座首와 別監 등의 鄕任이 4명, 그리고 會員이 13명이다.
성씨별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金氏 25명, 成氏 24명, 申氏 14명, 李氏 14명, 曺氏 8명, 蔡氏 6명, 南氏 6명, 朴氏 4명, 洪氏 4명, 柳氏 4명, 趙氏 4명, 孫氏 3명, 鄭氏 3명, 張氏 3명, 禹氏 2명, 兪氏 2명, 康氏 2명, 權氏 1명, 尹氏 1명, 安氏 1명, 具氏 1명의 입록이 확인된다.
『鄕案加錄草』는 상주에서 작성된 향안으로 향안이란 留鄕所의 구성원인 鄕員의 명부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지방통치는 國王-監司-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과 京在所-留鄕所(鄕廳)-面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 가운데 一鄕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였으며, 그 명단을 향안이라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 지방의 在地士族들은 유향소를 매개로 향촌운영에 관여하였으며 향안입록을 통해 鄕權을 확보, 鄕論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향안의 입록은 명망있는 사족 가문에 한정되어 배타적으로 운영되었다.
향안 작성의 추이는 지역별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재지사족의 정착이 활발했던 지역일수록 향안 작성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조선전기 監營이 위치했던 尙州牧은 安東府와 더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향안작성이 이루어졌다. 尙州鄕校에 현전하고 있는 『商山鄕彦錄』과 邑誌인 『商山誌』, 그 외 상주 출신 사족들이 남긴 각종 文集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상주지역의 향안 작성은 늦어도 16세기 중반 이전에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상주의 향안작성은 18세기에 들어와 점차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며 이는 노론계의 확산이 주요인이었다. 본래 상주는 東方五賢과 柳成龍을 배향한 道南書院이 창건된 곳이자 류성룡의 문인인 鄭經世의 고향으로 退溪에서 西厓로 이어지는 퇴계학파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었다. 향안의 입록에 있어서도 임란 이후 17세기 까지『상산향언록』 입록인의 대부분은 남인계 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경세의 壻가 되어 상주지역과 인연을 맺은 西人系 山林인 宋浚吉의 영향, 老論系 守令의 부임 등으로 인해 상주지역에는 노론세력이 점차 확대되었으며, 영남에서 최초로 서인계 서원인 興巖書院이 1702년이 건립될 만큼 상주는 영남지역 노론의 근거지가 되었다.
노론계의 확산은 상주지역 사족간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노론계 사족은 종래의 향안인 『商山鄕彦錄』외에 자신들만의 향안을 독자적으로 작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향안의 분열은 흥암서원에 전해지고 있는 『興巖書院鄕案續錄』의 錄序에서와 같이 戊申亂 이후 본격화 되었다. 1747년 작성된 『丁卯加錄』이 노론계열의 향안으로, 이 향안에는 흥암서원에 출입하던 노론계 인사가 입록되어 있다. 본 자료 또한 『정묘가록』의 연장선상에 있는 향안으로 입록인의 대부분은 노론계열임이 확인되고 있다.
『향안가록초』가 노론계열의 향안임은 興巖書院 자료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흥암서원에는 당시 서원을 출입하던 인사를 기록한 『靑衿錄』, 『院錄』 등이 현전하고 있다. 흥암서원 자료의 경우 결락, 누락 등으로 인해 정확한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들 자료와 『향안가록초』를 비교해 보면 상당수의 인사가 중복되고 있다. 일반향원 115명 가운데 22명이, 향임 및 회원 17명 가운데 8명이 흥암서원 자료에도 중복입록되고 있다. 자료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복율을 보이는 것은 곧 『향안가록초』가 노론계열의 향안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서원자료와의 중복뿐만 아니라 다수의 입록인이 당시 노론을 지지하는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향안가록초』의 작성을 주도한 회원인 成爾漢, 成爾漸, 成爾沆, 金致鳳, 柳以炳 등이 그 예로 이들은 1736년(영조 12) 兩宋, 즉 宋時烈과 宋浚吉의 文廟從祀를 청하는 연명 上疏에 참여하였다. 회원 외에도, 別監을 역임한 成爾濈, 일반 鄕員 가운데 南道轍, 蔡景淵 또한 疏에 참여하였음이 확인된다.
위에서와 같이 『향안가록초』는 흥암서원을 출입하던 노론계의 주도로 작성된 향안이다. 18세기 이후 상주의 사족 사회는 당색별로 분열되었으며, 향안의 작성 또한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상주지역의 향안작성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임란 후 상주의 재지사족들은 향안의 중수를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종래 南論을 고수하였던 상주에서 노론세력이 점차 확대되었고, 당색에 따른 사족사회의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는 향안의 작성에도 영향을 끼쳐 결국 향안은 독립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가록초』는 노론계가 작성을 주도한 향안이다. 본 자료는 당시 南·老로 분열되었던 상주 사족사회의 일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1차 작성자 :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