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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안(掌議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55.4773-20150630.Y153250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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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재임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755
형태사항 크기: 33 X 26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기해년 3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장의안〉으로 ‘행임록’이라 표제하였고 ‘장의안병부’라 별기하였다. 모두 82명의 역대 장의의 인명이 등재되었고, 그 중 입격 4인, 삭제 1인, 생존 15인이 있다. 성씨는 장, 변, 김, 이, 박, 정, 손, 권, 신씨 등 9개 성만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55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장의안(掌議案)으로 역대 장임직 인명을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己亥年 3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掌議案〉으로 ‘行任錄’이라 표제하였고 ‘掌議案幷附’라 별기하였다. 모두 82명의 역대 장의의 인명이 등재되었고, 그 중 入格 4인, 삭제 1인, 생존 15인이 있다. 성씨는 張, 卞, 金, 李, 朴, 鄭, 孫, 權, 申氏 등 9개 성만 있다.
조선초에 나라에서는 유교이념의 보급과 지방민의 敎育과 敎化를 위해 군현마다 鄕校를 세우고 敎官을 파견하였다. 『經國大典』에 의하면 府, 牧, 大都護府에는 從6品인 敎授, 郡과 縣에는 從9品의 訓導 등 모두 329명을 파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파견된 교관들은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임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校生 가운데서 대표를 선발하여 향교의 운영과 활동을 돕도록 하였다.
조선초 이후 향교교육이 점차 쇠퇴하고 교수, 훈도의 지위도 낮아지게 되자 17세기 이후에는 교관을 파견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향교는 官學인 관계로 守令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실제의 향교운영은 儒生代表들이 맡게 되었다. 이들을 총칭하여 校任이라 하였다. 『牧民心書』의 교임의 기록을 보면 ‘향교에서 일을 맡은 자는 校長 1人(남주지방에서는 都有司라 칭한다), 掌議 1人, 色掌 2人이다.’라고 하여 향교의 교임으로 교장(도유사), 장의, 색장의 이름을 들고 있으나 모든 향교가 똑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본 문서에 입록된 장의는 校貳라고도 부르는데 도유사와는 달리 모든 향교에서 장의라고 통용되었다. 비록 문서에는 장의의 인원과 체직기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비안향교 관련 여러 문서에서 현감 및 도유사, 장의 등의 수결을 통해 문서를 확인하는 단계의 모습을 볼 때 2인의 장의가 교임으로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의를 비롯한 교임의 선출하는 방법도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비안향교의 춘추향사시 임원에 대한 자료에 나타나 있는 비안향교도 대체로 비슷한 방식을 취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수임인 도유사가 봄의 釋奠祭가 끝난 자리에서 獻官, 儒林, 儒生들이 천거로 三望을 하여 수령에게 보고하면 수령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을 택임하고 나머지 장의, 색장 등은 도유사의 천거로 三望을 하고 아울러 官의 택임을 받아 선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교임의 선출에 수령의 택임을 거치는 것은 향교가 官學이었기 때문인데 수령의 결정은 대개 追認에 그치는 것이었고 유생들의 자치성에 더 큰 비중이 두어져 있었다.
선출된 교임은 관으로부터 差帖을 발급받는 것이 아니고 이름을 향교에 붙여놓는 형식으로 공포된 후 뒤이어 향교에서 보낸 임명장을 받은 뒤 정식으로 임명되는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그 달의 첫 朔望焚香祭에서 舊校任과 함께 祭禮를 거행하고 사무를 인수하게 한 뒤 향교의 職掌을 정식으로 담당하였다. 교임의 임기는 보통 1년으로 정해지는 것이 常例였다. 본 문서보다 앞선 시기의 장의안이 없기 때문에 장의의 체직기간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향교 교임은 향교를 대표함은 물론 향교내의 제반 사항을 주관하고 운영해 나갔다. 선초에는 수령의 협조를 받으면서 敎授, 訓導가 향교의 운영을 담당하였지만,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서는 교수, 훈도가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향교의 운영은 유생 가운데에서 선발된 교임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향교 교임의 임무는 향교에서 春秋로 거행되는 釋奠祭,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朔望焚香의 祭官이 되는 일이었다. 조선후기의 향교는 교육기능 대신 文廟에의 제례기능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교임의 제1차적 임무는 제례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또한 군현에서 춘추로 社稷神에 제사지내는 社稷祭, 惡鬼에게 제사지내는 ?祭 등에도 제관이 되어 제례를 행하였다. 한편 교임들은 향교재정의 운영도 담당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장의가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도유사는 향교의 대표자로서 운영의 세세한 대목은 별로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향교의 전반적인 實務는 장의가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교임들은 향교 건물의 유지와 보수를 주관하였다. 뿐만 아니라 향교의 圖書를 관리하고 보관하는 임무도 있었다. 교임들의 職掌은 향교에 국한되지 않고 수령의 諮問과 향촌의 교화에도 미쳤다. 향교는 양반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향촌기구로서 정치를 논의하는 것이기도 하였고 官政의 시비가 나오는 곳이었다. 교임은 이러한 향교의 대표자요, 운영자였기 때문에 향촌에서의 사회적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교임들은 敎化를 주관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교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회기강과 명분을 확립하고 양반우위의 신분적 위계질서를 유지할 목적에서였다.
장의는 도유사를 보좌하여 이러한 교임들의 職掌을 수행하는 이들로서 향교 운영의 實務를 담당한 이들이다. 본 문서에 드러나는 것이 단지 인명뿐이지만 비안향교에 남아 있는 도유사안과 유안 등과의 비교를 통해서 문서가 작성될 18세기 중반의 비안의 주요 성관 분포와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비안향교의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이들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본 장의안에 등재된 장의들의 성씨들을 살펴보면 張氏가 19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卞 17명, 金 15명, 李 12명, 朴 11명, 鄭 3명, 孫·權 각 2명, 申 1명 등으로 전체적으로 도유사 역임 성씨와 매우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중반의 비안향교의 교임 중 장의들의 인명을 기록한 자료이다. 장의는 도유사를 보좌하여 이러한 교임들의 職掌을 수행하는 이들로서 향교 운영의 實務를 담당한 이들이다. 본 문서에 드러나는 것이 단지 인명뿐이지만 비안향교에 남아 있는 도유사안과 유안 등과의 비교를 통해서 문서가 작성될 18세기 중반의 비안의 주요 성관 분포와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비안향교의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이들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이미지

원문 텍스트

掌議案
行任錄
乙亥三月日?堂行任錄
一齋有司己行
? 金鼎重
? 李尙矩
? 張斗星
? 金魯變 入格
? 張是箕
? 卞三近
? 朴慶先
? 卞三達
? 張是壁
? 卞三逸
? 張翰明
? 金文錫
? 朴承先
? 朴英烈
? 李漢弼
? 丘仲山
? 張斗杓
? 權暹
? 張汝翰
? 卞時徵
? 張夢奎
? 鄭元僑
? 張漢遇
? 金泰有
? 金道源
? 朴浩然
? 李夏弼 入格
? 金重錫
? 鄭達海
? 金萬鎰
? 金弼夏
? 卞楚和 入格
? 金萬鍾
? 朴世華
? 金應秋
? 朴泰然
? 卞重和
? 金纘曾
? 金鼎三
? 卞之和
? 張是翰
? 朴粲然
? 李大臨 入格
? 卞準和
? 孫命三
李大恒
? 金鼎九
? 張萬胤
? 李大咸
? 朴玄錫
? 卞爾和
? 李大益
卞千秋
? 卞有和
卞景和
? 張世堂
李大升
? 張世雄
? 卞宗和
? 張粲然
金遇兌
鄭錫徵
? 金澤南
? 張是郁
權撲 入格
卞後和
? 金師式
李大謙
李大蕃
? 朴元錫
? 李亨千
? 朴壽崑
卞泰和
? 金鯉變
? 張翰宙
? 金萬有
? 張震維
? 卞廷亮
禹錫九 入格
? 卞成彩
? 申瑞旭
? 張啓胤
金時鵬
? 張碩奎
? 卞廷益
李大春
? 朴東井
李大有
張大維
卞有彩 改廷龜
鄭世貞
李亨漢
金聲兌
金時虎
? 卞廷煜
張萬奎
金有秋
朴壽喬
金震麗
李陽復
鄭世銓
卞廷賓
張南翼 改名世經
卞廷奭
卞道成 改名道益
朴道徵 改名道行
? 鄭世欽
金聲振
? 金始聲
? 張漢翼
朴重賢
? 李大鷹
卞時璜
金仁行
金夏龜 改名東式
金重南
金圭錫
張大任
張聚奎
朴利錫
李大來
朴道傳
張封萬
朴壽崙
張斗元
? 金時?
李陽一
金翼龍
卞廷彦
? 朴鳳來
禹洪福
金震鐸
卞廷玉 改廷燮
金用式
李達中
李陽錫
李陽鳳
金見龍
鄭世元
鄭師孟
金始?
金?
一掌議己行
? 金鼎重
? 李尙矩
? 金魯變 入格
? 張斗星
? 張是箕
? 朴慶先
? 卞三達
? 張是壁
? 張翰明
? 卞三進
? 金萬鎰
? 卞三適
? 金文錫
? 張斗壽
? 鄭達海
? 孫萬善
? 張斗杓
? 張汝翰
? 李漢弼
? 張夢奎
? 卞三遇
? 金泰有
? 張漢遇
? 李夏弼 入格
? 鄭後僑
? 朴世華
? 張是翰
? 卞之和
? 卞再和
? 卞楚和 入格
? 金纘曾
? 朴粲然
? 卞爾和
? 張是載
? 李大臨 入格
? 卞準和
? 權暹
張世奎
? 卞震和
? 朴玄錫
? 金奉秋
張五相
? 張世堂
? 金敏秋
? 朴仁章
? 李大咸
? 朴泰然
? 卞宗和
金震珩
? 張五奎
? 李亨千
? 鄭世鵬
李大恒
? 卞千秋
卞景和
? 金用秋
? 張漢旭
金遇兌
? 孫命三
朴壽? 改名重赫
李大升
? 李大益
? 申瑞旭 改名瑞翰
李大謙
? 張聖奎
? 金師式
? 卞廷益
李大春
? 卞廷相
? 朴壽?
卞泰和
金有秋
? 朴東井
? 朴元錫
? 張碩奎
? 金聖鐸
張世九 改名世良
? 權命參
朴重勳
卞廷賓
李陽復
? 金始聲
一都有司己行
? 金鼎重
? 卞三近
? 朴宗先
? 金魯變 入格
? 張是箕
? 卞三達
? 張翰明
? 權?
? 朴慶先
? 李夏弼 入格
? 張是璧
? 金弘重 入格
? 金重錫
? 朴浩然
? 卞時徵
? 朴世華
? 張漢遇
? 金纘曾
? 金泰有
? 卞楚和 入格
張世奎
? 張命三
? 張是翰
? 鄭後僑
權撲 入格
朴粲然
? 卞準和
? 金敏秋
? 卞千秋
? 金師式
? 張五奎
? 金用秋
? 張聖奎
卞景和
李大謙
卞準和
有司 朴粲然
掌議 卞之和
都有司 李夏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