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부터 1751년까지 상주향교의 삭망제를 주관한 교임 명부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尙州鄕校의 『焚香錄』으로 庚午年 8月부터 辛未年 12月까지, 매월 초하루(朔)와 보름(望)에 향교에서 거행된 朔望祭의 주관자를 기록하고 있다. 제례가 거행된 날짜와 주관인물의 官職名, 향교에서의 직책, 그리고 성명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먼저 정확한 작성연도는 입록인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辛未年 正月 제례를 주관하였던 牧使 金光遇의 경우 1707년생으로 1750년 尙州牧使로 부임하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庚午年는 1750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상주향교에서의 분향은 매번 새로운 인물이 제례를 주관하는 것은 아니며 중복적으로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중복을 제외한 제례 주관자는 총 30명이 확인된다. 이들을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金氏 10명, 成氏 5명, 李氏 4명, 趙氏 4명, 蔡氏 2명, 申氏 1명, 曺氏 1명, 權氏 1명, 孫氏 1명, 韓氏 1명이 확인된다.
상주향교 삭망제의 주관은 牧使 또는 儒生이 주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都有司(上齋), 掌議, 齋任등이 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 도유사, 장의, 재임은 향교의 校任으로 향교 운영의 실질적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본 자료외에 상주향교의 任員錄(1785~1800), 完議 등의 자료를 검토해 보았을 때 상주향교의 교임은 대체로 도유사 1人, 장의 2人, 재임 3人 체제였으며 이들은 상주의 유력 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제례의 대부분을 도유사, 장의, 재임 등과 같은 향교 교임이 담당하고 있는 것은 향교의 제례 기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주지하듯 향교는 유교를 보급하는 지방의 유일한 官學이자 孔子를 비롯한 여려 聖賢의 위패를 모시는 유학의 상징처였다. 따라서 제례의 거행은 교육과 함께 향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례의 시행은 교임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였다. 상주향교의 교임 및 청금유생과 관련한 제 규정을 기록한 完議(1664년, 1671년)의 대부분이 제례의 진행과 참석을 강제하는 내용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제례는 교임의 선출을 비롯한 향중범사를 논의하는 公會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의 양반사족들은 향교에 출입하며 각종 제례를 주관하였으며 이를 통해 향교운영 및 鄕論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본 자료가 작성된 18세기 후반의 경우 향안 및 서원안이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아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17세기~18세기 초반에 작성된 상주향교의 『駿焚錄』, 『焚香錄』, 『靑衿錄』등에 기록된 교임과 청금유생의 대다수는 鄕案 또는 書院案에 중복입록되고 있음이 확인되며 이는 당시의 교임이 양반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750년과 1751년의 『분향록』에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교임 가운데 서인계 인사가 다수 발견되는 점이다. 본래 상주는 退溪에서 西厓-愚伏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가 주류를 이루는 곳으로 류성룡을 제향하는 道南書院이 창건된 곳이다. 향교의 교임 또한 도남서원을 출입하던 남인계열 인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이 『駿焚錄』(1620~1625) 등의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18세기 서인계 山林인 宋浚吉(정경세의 壻)의 영향과 영남내 세력확대를 시도한 老論의 의도가 접목, 상주에서도 점차 노론계열이 확대되어 갔으며 결국 興巖書院이 1702년에 창건되기에 이른다. 이에 상주는 영남노론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노론세력은 흥암서원을 중심으로 결집, 그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서원 뿐만 아니라 향교의 제례에도 개인 또는 교임의 자격으로 참여, 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노론계열의 제례 주관은 『분향록』입록인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입록인 가운데 金致英, 成爾潤, 成爾沆, 申光兌 등은 흥암서원의 원생을 기록한 『靑衿錄』, 『院錄』 등에도 입록되어 있다. 흥암서원 자료의 경우 누락, 결락 등으로 인해 정확한 비교는 힘들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흥암서원에 출입하고 있었던 노론계열이라 생각된다. 흥암서원 자료와의 연관성 외에도 『분향록』 입록인 가운데 노론을 지지하는 정치활동에 참여하였던 인사가 발견되고 있다. 金南紀, 金致光, 金致英, 成碩柱, 成爾潤, 成爾沆, 申光兌 등이 그 예로 이들은 1736년(영조 12) 兩宋, 즉 宋時烈과 宋浚吉의 文廟從祀를 청하는 연명 上疏에 참여한 노론계열 인사였다.
위의 예에서와 같이 당시 상주의 노론세력은 서원뿐만 아니라 향교의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으며 이는 교임의 역임, 제례의 주도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는 당시의 향교가 단순한 교육, 제향 기관이 아닌 유학의 상징이자 향론 형성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자료적 가치
『분향록』은 조선후기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제례를 주관한 인사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제례와 이를 주관한 교임의 구성, 그리고 상주지역 사족의 동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