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7년 상주목에서 작성된 향안
내용 및 특징
『丁卯加錄』은 조선시대 慶尙道 尙州牧의 鄕案이다. 본 자료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丁卯年에 작성된 향안으로 鄕員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으며 分錄의 형식으로 총 3회에 걸쳐 작성되었다. 입록인의 성명을 기록하고 상단에는 직책 및 관직명을 기록하고 하단에는 改名 여부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먼저 문서의 작성연도인 丁卯年은 입록인의 분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進士 曺挺龍, 都廳 進士 金相箕, 前參奉 成爾漢 등은 『丙午式年司馬榜目』을 통해 登科 연도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1726년(영조 2) 式年試에 進士로 등과한 자들이다. 따라서 『정묘가록』은 1747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정묘가록』의 총 입록인원은 120명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刀割된 경우가 12명으로, 이를 제외한 실제 확인 가능한 입록인의 수는 108명이다. 작성순서별 입록인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최초 작성된 향안에는 97명 입록되어 있으며 97명 중 도할된 경우가 3명으로 실제 94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일반향원은 83명이며 이 가운데 3명이 도할되어 있으며, 이외에 都廳 1명, 公事員 2명, 會員 11명이 입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分錄되어 1명이 입록되었으나 도할되어 확인할 수 없다. 마지막의 分錄의 경우 22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8명은 도할되어 있다.
성씨별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金氏 22명, 李氏 14명, 成氏 12명, 申氏 9명, 柳氏 6명, 鄭氏 6명, 趙氏 5명, 曺氏 5명, 康氏 5명, 韓氏 4명, 兪氏 3명, 南氏 2명, 孫氏 2명, 洪氏 2명, 禹氏 2명, 蔡氏 1명, 朴氏 1명, 權氏 1명, 全氏 1명, 尹氏 1명, 黃氏 1명, 河氏 1명, 高氏 1명, 安氏 1명, 具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입록인의 직역별로는 前參奉 1명, 進士 2명, 生員 2명이 확인되면 나머지는 모두 幼學으로 보인다.
『정묘가록』은 앞서 언급하였듯 정묘년에 작성된 향안이다. 향안은 留鄕所의 구성원인 鄕員의 명부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지방통치는 國王-監司-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과 京在所-留鄕所(鄕廳)-面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 가운데 一鄕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였으며, 그 명단을 향안이라 하였다. 지방의 士族들은 향안입록을 통해 鄕權을 확보, 鄕論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향안은 16세기 중엽 이후 본격적으로 작성되었고 사족들은 배타적 향안 작성을 통해 자신들의 향촌내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조선시대 상주목의 경우에도 이러한 향안의 작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8세기 이후에는 黨色에 따른 사족 간 분열 양상이 뚜렷해지면서 향안 또한 각 당파별로 작성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 『商山鄕彦錄』과 본 자료인 『정묘가록』이 그 예이다.
상주에서의 최초 향안작성은 16세기 중엽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임란으로 향안이 소실되자 1595년 金鍊·金覺 등에 의해 개수되었다. 이후『商山鄕彦錄』이라는 이름으로 18세기까지 追錄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영남지역 노론계의 확산에 따라 향안작성에 있어서도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본래 상주는 東方五賢과 柳成龍을 배향한 道南書院이 창건된 곳이자 류성룡의 문인인 鄭經世의 고향으로 退溪에서 西厓로 이어지는 퇴계학파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었다. 향안의 입록에 있어서도 임란 이후 17세기 까지『상산향언록』 입록인의 대부분은 남인계 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경세의 壻가 되어 상주지역과 인연을 맺은 西人系 山林인 宋浚吉의 영향, 老論系 守令의 부임 등으로 인해 상주지역에는 노론세력이 점차 확대되었으며, 영남에서 최초로 서인계 서원인 興巖書院이 1702년이 건립될 만큼 상주는 영남지역 노론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와같은 서인계의 확산은 상주지역 사족간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노론계 사족들은 『商山鄕彦錄』외에 따로이 자신들만의 향안을 작성하기에 이른다. 『정묘가록』이 그것으로 이는 서인계 사족의 향안이다.
『정묘가록』이 서인계 사족의 향안이었음은 상주 노론 인사의 참여 및 흥암서원 『院錄』과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정묘가록』에서 확인되는 노론 계열로는 昌寧 成氏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창녕 성씨는 17세기 중엽 이후 상주지역 서인계의 핵심으로 부상한 成灠 계열로 成憲柱, 成爾漢, 成道柱 등의 향안 참여가 확인된다. 『정묘가록』 작성시 公事員을 담당한 成憲柱는 兩宋, 즉 宋浚吉과 宋時烈의 文廟從祀請願疏의 疏頭로 활약한 인물이며, 會員 가운데 成爾漢은 宋時烈과 權尙夏의 문인인 成晩徵의 姪이다. 여기서의 공사원 및 회원은 『정묘가록』의 작성을 주도한 인사들로 보인다. 이외에 일반 향원으로 입록된 成道柱는 成德徵의 孫子로 성덕징은 金長生 陞廡疏의 疏頭가 되고 1728년(英祖 4) 戊申亂을 진압하기 위한 의병에도 참여하였던 상주 노론계의 핵심 인사였다. 이러한 창녕 성씨들의 참여는 곧 『정묘가록』이 서인계열이 주도한 향안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묘가록』 입록인 가운데 흥암서원 원생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정묘가록』이 작성된 1747년 전후의 흥암서원 『원록』은 현전하지 않기에 『정묘가록』입록인 전부와 흥암서원간의 관계를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묘가록』에서 會員으로 기록된 인사들의 상당수는 흥암서원 『院錄』에 입록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회원 11명 가운데 成爾漢, 趙重台, 金以恒, 金成五, 成爾漸, 金邦俊, 申光復 이상 7명은 흥암서원 원생 출신이다.
이상과 같이 『정묘가록』은 상주사족 가운데 흥암서원을 출입하던 노론계의 주도로 작성된 향안이다. 18세기 이후 상주의 사족 사회는 당색별로 분열, 따로이 향안을 작성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자료는 이와같은 조선후기 상주지역 사족의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상주지역의 향안작성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임란 후 상주의 재지사족들은 향안의 중수를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종래 南論을 고수하였던 상주에서 서인세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사족사회는 분열되었으며 결국 향안의 작성 또한 당색에 따라 독립적으로 작성되었다. 『정묘가록』은 서인계 향안으로 당시 남인계와 서인계로 분열된 상주 사족사회의 일단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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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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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1차 작성자 :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