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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향교(商州鄕校) 분향록(焚香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26.4725-20150630.Y153210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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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상주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작성시기 1726
형태사항 크기: 23 X 23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안내정보

상주향교(商州鄕校) 분향록(焚香錄)
『분향록』은 1726년 11월부터 1728년 11월까지 상주향교(尙州鄕校)에서 매월 초하루(朔)과 보름(望) 거행된 삭망제(朔望祭)를 주관한 인물을 기록한 명단이다. 제례의 날짜와 종류 및 주관인물을 기록해 놓았다.
삭망제는 대체로 장의(掌議)와 재임(齋任)이 주관하였으며, 때로는 及第者가 이를 고하는 恩謁, 또는 儒生이 恩謁하는 경우가 소수 확인된다. 여기에서 장의와 재임은 향교의 교임(校任)으로 향교운영의 실질적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본 자료외에도 상주향교에 남아있는 임원록(任員錄), 완의(完議) 등의 자료에 교임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당시 교임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교임은 향교의 수장인 도유사(都有司) 1인, 장의 2인, 재임 2인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향교는 유학(儒學)을 교육하는 지방의 유일한 관학(官學)이자 공자(孔子)와 선현(先賢)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유학의 상징처였다. 또한 향교는 지방의 양반사족이 모여 향중의 여러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양반사족들은 교임 또는 유생으로 향교에 출입하고 제례를 주관함으로써 향교의 운영 및 향론(鄕論)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실제 상주향교에 현전하는 교임관련 기록을 검토해 보면 대부분이 향안 및 서원안 등에서도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향안과 서원안의 입록은 양반사족임을 인정받는 것이며 이는 곧 교임이 상주의 양반사족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제례를 주도하는 교임 및 개인 가운데 서인계 인사가 다수 발견되는 점이다. 본래 상주는 퇴계학파(退溪學派)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었으나 17세기 후반 노론계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으며, 결국 영남에서 최초로 서인계 서원인 흥암서원(興巖書院)이 건립될 만큼 서인세력이 강성한 곳이었다. 이들 서인계 세력은 서원 뿐만 아니라 향교의 출입 및 제례의 주도에 적극적이었다. 상주 노론의 핵심인 창녕성씨를 비롯하여 다수의 노론계 인사들이 향교의 교임을 역임하거나 제례에 참여하고 있음을 『분향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1726년부터 1727년까지 상주향교의 삭망제를 주관한 교임 명부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丙午年(1726) 11월부터 丁未年(1728) 11월까지 작성된 『焚香錄』이다. 『분향록』은 주로 매월 초하루(朔)와 보름(望)에 거행된 朔望祭 비롯하여 及第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 비정기적으로 실시된 恩謁 등의 제례에 참석 및 주관한 인사를 기록하고 있다. 祭禮가 거행된 날짜와 종류, 주관인물의 官職名 또는 향교 직책, 그리고 성명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제례의 주관은 매번 새로운 인물이 주관하는 것은 아니며 중복적으로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중복되는 경우를 제외한 제례 주관인의 수는 총 20명이다. 성씨별로는 金氏 5명, 成氏 3명, 申氏 3명, 曺氏 2명, 南氏 1명, 安氏 1명, 尹氏 1명, 李氏 1명, 趙氏 1명, 洪氏 1명, 黃氏 1명이 확인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상주향교의 제례는 及第者가 이를 고하는 恩謁, 또는 儒生이 恩謁하는 경우가 소수 있지만 대부분은 삭망제로 都有司, 掌議, 齋任 등과 같은 향교 운영의 실질적 책임자인 校任이 주도하고 있다. 본 자료외에 상주향교의 任員錄, 完議 등을 분석해 보았을 때 교임은 대체로 도유사 1人, 장의 2人, 재임 3人 체제로 구성되고 있었다.
삭망제 및 恩謁과 같은 제례가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것은 향교의 제향기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주지하듯 향교는 유교를 보급하는 지방의 유일한 官學일 뿐만 아니라 孔子를 비롯한 聖賢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유학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제례의 거행은 교육과 함께 향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례의 시행은 교임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였다. 상주향교의 교임 및 청금유생과 관련한 제 규정을 기록한 完議(1664년, 1671년)에서 그 규정의 대부분이 제례의 진행과 참석를 강제하는 내용인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제례는 교임의 선출을 비롯 향중범사를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방의 양반사족들은 향교에 출입하며 각종 제례를 주관하였으며 이를 통해 향교운영 및 鄕論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본 자료의 작성을 전후한 시기의 향안 및 서원안이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아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앞서 17세기~18세기 초반에 작성된 상주향교의 完議의 내용이나『駿焚錄』, 『焚香錄』, 『靑衿錄』등에 기록된 교임과 청금유생의 대다수는 鄕案 또는 書院案에 중복입록되고 있다는 점을 보았을때 당시의 교임은 양반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서인계 사족의 제례 주도가 다수 발견되는 점이다. 본래 상주柳成龍을 배향하는 道南書院이 창건된 곳이자 류성용의 문인인 鄭經世의 고향으로 남인계열 주류를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정경세의 壻가 되어 상주와 인연을 맺은 宋浚吉의 영향, 노론계 守令의 부임 등으로 인해 17세기 후반 노론계가 점차 확산되었으며 결국 興巖書院1702년에 창건되기에 이른다. 흥암서원은 영남최초로 서원건립에 성공한 노론계 賜額書院으로 상주지역의 노론세력은 이곳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그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제례의 참석 및 주도 등과 같은 향교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다.
노론세력의 이러한 향교는 참여는 『분향록』과 『丁卯加錄』·『鄕案加錄草』 등과 같은 향안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丁卯加錄』·『鄕案加錄草』은 상주의 향안 가운데 하나로 특히 노론계 사족이 주도하여 작성한 사족 명부이다. 각 자료의 작성연대 차이로 인해 정확한 비교는 어려우나 몇 몇 인물의 경우 중복입록이 확인된다. 향교의 제례에 참석한 金相箕, 申光復, 金以恒, 成憲主, 趙重稷 등이 그 예로 이들은 위의 향안에도 입록되어 있다.
향안과의 관계 외에도 당시 상주의 유력 노론의 제례 참여가 확인되는데 成憲柱, 曺挺龍, 趙重稷을 예로 들 수 있다. 昌寧 成氏인 성헌주1727년 4월과 8월 향교의 望祭를 주도한 인사로 1754년(英祖 30) 兩宋, 즉 宋浚吉宋時烈의 文廟從祀請願疏의 疏頭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父인 成爾溟 또한 都有司를 역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1727년 11월 恩謁한 昌寧 曺氏 조정용進士 출신으로 1728년(영조 4) 李麟佐의 亂이 발생하자 남인들로부터 당파가 다름을 빌미로 역적으로 지목되었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과 후진 양성에 매진한 인물이다. 咸安 趙氏인 조중직1727년(영조 3) 文科에 급제한 자로 급제한 그 해 5월 향교에 恩謁하였다. 이후 司憲府 持平을 역임하였으며 1738년(영조 14)에는 金尙憲의 忠節을 찬양하고, 안동에서 일어난 金尙憲書院(淸陰書院) 훼철사건 당시 少論으로 南人을 두둔한 朴文秀의 파직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바 있는 대표적인 노론계 인사였다.
위의 예에서와 같이 당시 상주의 노론세력은 서원뿐만 아니라 향교의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으며 이는 교임의 역임, 제례의 주도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는 당시의 향교가 단순한 교육, 제향 기관이 아닌 유학의 상징이자 향론 형성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자료적 가치
『분향록』은 조선후기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제례를 주관한 인사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 상주향교에서 거행된 제례와 이를 주관한 교임의 구성, 그리고 상주지역 사족의 동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유기선

이미지

원문 텍스트

十一月初一日
都有司 成爾溟
掌議 金處琮
曹景稷 同月同日以新恩謁

十一月初九日
金相箕 以新恩謁

十一月十四日
曹挺龍 以新恩謁

十一月望
都有司 成爾溟
齋任 成爾涉
十二月朔
掌議 申鎭遠
齋任 金弘鏡
十二月望
掌議 申鎭遠
丁未正月朔
都有司 成爾溟
同月望
掌議 申鎭遠
齋任 成爾涉
金弘鏡
正月三十日
安垕奭 以及第 居報恩 新恩謁

二月朔
掌議 申鎭遠
同月望
幼生 申老復
三月朔
掌議 金處琮
同月望
掌議 申鎭遠
閏三月朔
掌議 申鎭遠
閏三月望
掌議 金以恒
同月日
金裕壽 以新恩謁

同月日
尹相甲 以新恩謁

同月日
黃龍河 以生員新恩謁
聖 四月朔日
齋任 成爾涉
同月初三日
李師魯 以新恩祗謁

四月朔日
幼生 成憲柱
五月朔日
掌議 申鎭遠
同月日
申光翰 及第新恩謁

同月初六日
金以復 以新恩謁

五月望
申鎭遠
同月晦
洪應龜 以新恩謁

六月朔
成爾溟
五月十五日
南■ 以及第新恩謁

同月日
趙重稷 以及第新恩謁

六月望
掌議 申鎭遠
金以恒
齋任 金弘鏡
七月朔
掌議 金以恒
七月望
齋任 成爾涉
八月朔
掌議 金以恒
齋任 成爾涉
金弘鏡
八月望
幼生 成憲柱
九月朔
齋任 金弘鏡
同月望
掌議 申鎭遠
十月朔
掌議 申鎭遠
十月望
掌議 申鎭遠
十一月朔
都有司 成爾溟
掌議 申鎭遠
金以恒
齋任 金弘鏡
同月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