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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청금록(靑衿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1714.4773-20150630.Y153250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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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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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714
형태사항 크기: 35 X 24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경인년 7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청금록〉으로 액내, 액외의 구분 없이 56명(입격 2, 삭제 4)이 등재되어 있으며 5명이 추록되어 있는 명부이다. 인명과 문서 작성 당시 생사 상황을 인명 상단부에 ‘헌’이라는 표기로 별도로 추기하였을 뿐 별다른 서문이나 절목 등의 내용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삭제된 이들에 관한 사항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문서 말미에는 현감의 수결과 별유사 2인, 도유사 1인, 장의 2인, 유사 1인의 수결을 날인하였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14년 7월에 작성된 비안향교(比安鄕校) 청금록(靑衿錄)으로 제1질 74명, 제2질 34명으로 도합 108명의 인명을 입록한 문서
자료의 내용
甲午年 7월에 작성된 比安縣 〈靑衿錄〉이다. 전체 구성이 第1秩, 第2秩로 구성되어 있는데 1秩에는 74명, 2秩에는 34명으로 도합 108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인명과 入格여부만 추기하였을 뿐 별다른 序文이나 節目 등의 내용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문서 말미에는 縣監의 수결과 장의 1인, 유사 1인의 수결을 날인하였다. 현전하는 비안현의 청금록 중 2번째로 오래된 것으로 앞선 청금록이 작성된 지 4년이 지난 후의 문서로 적지 않은 수의 인명이 중복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재양성과 향촌교화를 위해 양반은 물론 평민까지도 16세 이상이면 校生으로 향교에 입학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향교의 교생에게는 軍役의 면제, 무상교육, 하급관리로의 진출 등 각종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권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郡縣의 大小에 따라 교생의 수가 차등적으로 법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법정 액수의 규정은 향교 본연의 역할인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정이 반영되면서 서얼 및 평민층의 자제의 입교, 避役을 위한 입교 등 점차 폐단이 늘어나는 상황과 결부되면서 향교는 더 이상 지방 士族들 중심으로만 작용하는 것에 한계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윽고 향교가 가진 교육적 기능이 상실되어 가면서 재지사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에는 한계점을 가진 곳으로 변모해 가는 상황으로 치달아 갔다. 이에 향교 교생의 본연의 임무인 교육, 제향, 지방민들의 교화라는 역할의 향교 존재의 이유는 거의 지켜지지 못하게 되어 결국에는 특권만이 남발되어 조선 전체의 군역 부족 등의 부작용만을 낳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교생고강을 실시하는 등 향교의 실질적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는 정책을 시도하지만 이는 오히려 양반사족 자제들의 향교 교생으로의 입학을 회피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후기로 오면서 양반들의 군역면제가 점차 보편화되는 추세에 편승하여 부작용은 더욱 심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양반사족들은 교생으로의 향교 입학을 회피하였을 뿐 향교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문묘가 배치된 향교는 국가 이념인 유학이 지방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갈수록 祭享의 장소로서 오히려 지역문화의 중심지가 되어갔고, 어느 지역에서나 文廟배향행사는 유교행사이자 유림의 행사였으므로 지방의 지배층들로서는 이에 직, 간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향교는 지방의 유일한 官學이자 孔子의 위패를 모신 성리학 전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양반사족들은 종래의 교생으로의 입학과 향안의 입록을 피하는 대신 그들만의 명부인 靑衿錄을 작성하고 스스로 청금유생이라 칭하면서 향교의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던 것이다.
청금록에 입록된 이들은 평민, 庶孼들로 구성된 교생과 대비되는 존재들로 校任과 더불어 향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인적 구성요소였다. 청금록에 입록되는 인물의 정원은 특별히 정액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재지사족의 동향과 관련하여 입록자의 수가 변동되는 경향이 있다. 본 문서보다 앞선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1710년 청금록에는 액내와 액외를 도합하여 약 5~60여 명의 인원이 입록되어 있지만 4여 년이 경과한 시점인 본 문서가 작성될 1714년에는 약 2배가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숫적 변화는 본 문서에 부기된 사항이 없어 직접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없지만, 대체로 17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영남 남인계열의 과거 급제나 중앙정계 진출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양반신분의 유지를 위한 비굦거 용이한 방법으로서 청금록에의 등재를 갈망하게 되면서 이와 같은 결과가 빚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문서 작성 연도의 간지가 ‘갑오’년으로 되어 있는데,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나머지 2건의 청금록과 이전에 작성되어진 유안 등을 비교해 보면 갑오년은 1714년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반으로 넘어 오면서 비안지역은 사족층의 구성이 다양화되는 경향을 나타내는데, 본 문서가 작성된 시점에서는 뚜렷한 성씨의 변동을 살펴볼 수는 없다.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유안 및 청금록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성씨들의 숫적 증가만이 두드러져 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초반에 작성된 비안향교 〈청금록〉으로 비안지역을 재지적 기반으로 한 청금유생들의 인적구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비안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여타의 인명부 관련 문서들과 시기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생산된 문서들의 중간과정의 인적구성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이미지

원문 텍스트

靑衿錄
甲午七月日比安縣靑衿
錄第一秩
朴德一
卞璧 入格
張翊 入格
金鈺 入格
張乃綱 入格
金鏡 生員
卞瀅
南薰
禹勛
金鉉 入格
李汝華 入格
朴珌
朴琳
朴琉
鄭珣
金壽益
張景?
鄭再興
金樟
金鼎重 忠義衛
李繼祖
李尙矩
金虎燮 入格
朴宗先
鄭道昌
張{?/晃}
張是參
張是星
鄭再隆
張宗?
張(?)
權宗胤
張一大
金?
金尙玭
金尙琨
李汝桂 入格
李纘祖
禹成業
禹興業
李成矩
金振聲
朴宗烈
卞應?
金豹燮
張斗星
鄭再振
張是箕
鄭再起
張?
張斗海
卞應待
金魯燮 入格
張是樞
權體道
朴光先
朴慶先
鄭承?
禹昌業
金尙球
張?
朴明烈
金尙琳
卞應復 改三達
金鯉燮
張是壁
張纘祖
金興祖
南拱極
朴珩 移居安東
金世琯
金信吉
朴昌烈 改名成輪
鄭業昌
靑衿第二秩
康以元
金其業
金遵業
禹拜善
金昌祖
金承緖
孫振立
金徽業
南拱辰
禹承績
金晩業
金是極
金光載
禹丕績
金善鳴 入格
禹纘績
郭衛鎭
郭邦?
孫起立
金念宗
權有道
金焞
金銓
金振宗
金守常
李孝曾
李孝閔
金敬宗 改名起敏
權尙中
金由義
郭邦翼
郭安世
朴善基
林時中
丙申六月十二日 掌議 金 [手決]
有司 張 [手決]
縣監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