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유안(儒案)으로 유생을 액내와 액외, 추록, 동몽으로 구분하여 기록한 인명부
자료의 내용
庚辰年 8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儒案〉으로 총 42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에는 額內 19명, 額外 15명, 追錄 2명, 童蒙 6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액외 중에는 年滿 2명, 故 1명, 余丁 1명, 削籍 2명이, 동몽 중에는 盜錄 2인이 포함되어 있다. 1700년에 작성된 유안으로 현전하는 비안향교 유안 중에 4번째로 작성된 것으로 앞선 시기의 유안이 대게 2~3년에 한번씩 작성되었는데 반해 본 유안은 앞선 것보다 31년이 지난 후에 작성된 것으로 사이에 작성된 유안이 유실된 것인지, 유안 재작성 기간이 오래 걸린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유안은 士族 중심의 향촌질서의 강화, 鄕吏 계층에 대한 제어, 官權으로부터 향권의 보호 등의 필요성에 의해 작성된 재지사족 권위의 상징이었다. 특히 16세기 이래 중앙정계와 지방의 재지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사림파 세력들은 향내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만의 명부를 작성하여 왔다.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무엇보다 흐트러진 향촌질서의 복구였다. 이는 임난 직후 바로 儒案을 중수하고 향촌사회를 정비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비안지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원래의 비안향교는 관아의 소재지였던 비안읍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지방의 유생들이 다시 모여 향교재건을 협의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짓도록 합의가 되었다. 5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608년에 착공하여 1610년에 향교가 준공되었다고 한다.
유생의 명부인 유안 작성의 일반적 양상은 17세기에 본격화되어 18세기 중후반부터 향촌 내 사족층의 분화 및 新鄕 세력의 대두와 서로간의 갈등으로 작성이 종식되는 경향을 보인다. 현전하는 문서를 통해 비안의 유안도 17세기 중반부터 제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18세기 중반까지 유안 작성의 일반적 양상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 문서를 포함한 비안의 유안은 모두 5책으로 額內와 額外, 追錄 등으로 구분되어 작성되어 있다. 유안에는 인명을 중심으로 年滿, 盜錄, 故, 改名 등과 같은 간략한 변동된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어 상세한 입록 및 추록과정, 심사 등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한계가 있다.
비안의 경우 18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유안의 명칭이 청금록으로 변모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생을 교생과 구분하기 위해 명칭을 분리하였는지 청금록 작성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기조에 맞춰 명칭을 변경하였는지는 비교할 수 있는 교안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본 문서에서와 같이 액내와 액외, 동몽 등으로 구분하여 작성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는 것만 알 수 있다. 통상적으로 향교 정원은 액내만을 『經國大典』에서 규정하고 있는데 비안은 당시 현으로서 액내정원 30명을 맞추어 향교에 입학시켰을 터인데, 본 문서에서는 19명 만이 입록되고 있어 앞서 작성된 1669년 유안에 비해 11명이 줄어들고 있지만, 부기된 사항이 없어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정액 수가 미달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액내와 액외 각각 1명씩 삭적되어 있는 것도 나타나는데 이 또한 어떠한 사정이 반영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편 입록된 이들의 성씨별 분포를 보면 액내를 중심으로 金氏가 액내 7명, 액외 5명, 동몽 2명으로 가장 많고, 南 액내 3명, 추록 1명, 朴 액내 2명, 액외 1명, 동몽 1명, 秦 액내 2명 순인데 특이할 만한 점은 앞선 유안에서 꾸준히 액내 교생을 배출하였던 張, 鄭, 卞氏가 한명의 액내교생도 입록하지 못하고 있고, 秦, 申, 吳氏 등 새롭게 입록되는 성씨가 나타다는 점이다. 이는 임진, 병자의 兩亂과 당쟁의 격화, 그리고 상속제도 및 혼인관습 등이 17세기 중반부터 현격하게 달라지는데서 말미암은 결과로 보여진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초반의 비안에 재지적 기반을 둔 이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본 문서를 비롯하여 총 5책의 유안 중 4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문서로 유안에 등재된 성씨들의 변화양상을 보여준다. 5책의 유안이 모두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의 것들로 구성이 되어 있고 18세기 초반부터는 청금록을 따로 작성하는 것으로 보아 유생들의 명부만을 따로 분절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