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유안(儒案)으로 유생을 액내와 액외로 구분 및 동해년 8월의 추록을 병기한 인명부
자료의 내용
丁未年 2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유생명부인 〈儒案〉으로 액내유생 33명과 액외 22명, 그리고 문서말미에 동년 8월에 追錄된 14명 등 총 69명의 인물의 인명만이 기록된 문서이다.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유안 중 2번째로 작성된 것으로 앞선 유안의 작성된 지 3년만인 1667년에 작성된 것이다. 액내와 액외, 추록된 인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성관은 김씨이고, 이어서 張, 鄭, 卞, 朴, 李 순으로 입록되어 있어 3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적구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유안은 사족중심의 향촌질서의 강화, 향리계층에 대한 제어, 관권으로부터 향권의 보호 등의 필요성에 의해 작성된 재지사족 권위의 상징이었다. 특히 16세기 이래 중앙정계와 지방의 재지세력의 자리를 잡기 시작한 사림파 세력들은 향내의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案을 작성하여 왔다. 壬亂 이후 재지사족들이 기울인 가장 일차적 관심사는 무엇보다 흐트러진 향촌질서의 복구였다. 이는 먼저 임난 직후 바로 유안을 중수하고 향촌사회를 정비하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비안지역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의 비안향교는 관아의 소재지였던 비안읍에 있었는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에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지방의 유생들이 다시 모여 향교재건을 협의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짓도록 합의가 되었다. 5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608년에 착공하여 1610년에 준공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비안향교는 현서 1리 지점에 있었으나 이 책이 간행되던 당시(1729년)에는 현동지점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임난 직후의 移建은 현서에서 현동으로 이동해서 지은 것을 말한 것이고, 1729년 이후의 어느 때로 보이는 해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유생의 명부인 유안 작성의 일반적 양상은 17세기에 본격화되어 18세기 중, 후반부터 향촌 내 사족층의 분화 및 신향 세력의 대두와 갈등으로 작성이 종식되는 경향을 보인다. 비안의 유안도 17세기 중반부터 제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18세기 중반까지 그러한 경향은 지속된다. 이 기간 작성된 유안은 모두 5책으로 액내, 액외, 추록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역의 사족 명부격인 유안은 靑衿錄, 儒林錄, 儒道會員錄, 明倫會員錄 등으로 작성되고 있다. 본 유안에는 인명을 중심으로 개인의 移居, 年滿, 入格 등의 간략한 변동내용만을 기록하고 있어 상세한 입, 추록 및 심사과정 등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비안향교에는 현전하는 자료로서 교생안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향교교생의 분화과정을 유안과 청금록의 작성을 통해서만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등재인원의 수는 문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앞선 1664년의 유안과 비슷하게 액내 33명, 액외 22명, 추록이 14명으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앞선 시기의 것에 비해 액내는 3명, 액외는 4명, 추록은 8명이 증가하였지만 부기사항이 없어 어떠한 사정이 반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등재된 인물들의 성씨별 분포에서도 앞선 시기의 유안과 크게 다르지 않아 金, 張, 禹, 鄭, 卞, 朴, 李, 權, 南, 郭, 林氏 등 11개 성씨가 있으며 특히 김씨와 장씨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17세기 중반의 상속 및 혼인관습 등이 비안지역에서는 일정부분 유지되고 있던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앞선 유안에 입록된 이들의 상당수가 본 유안에서도 중복 입록되고 있는 현상을 통해서도 17세기 중반의 비안지역의 유력가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에 대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비안향교의 경우 교생의 명단을 기록한 문서들이 대부분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의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대강을 살펴보면 액내와 액외로 구성을 하거나 동재유안이라 하여 동재에 소속된 이들을 따로 유안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청금록을 따로 작성한 것으로 보아 유생들의 명부만을 따로 분절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향교교생으로서 액내와 액외만으로 구분짓던 인명부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비양반층의 입록을 구분 짓기 위해 유안이라 칭하던 것을 청금록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롭게 작성해 나갔는데 본 문서는 그러한 과정의 초기에 해당되는 문서로 앞선 시기에 작성된 유안과 더불어 17세기 중반 비안향교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계층의 인명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