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4년 비안향교(比安鄕校) 유안(儒案)으로 유생을 액내와 액외로 구분하여 기록한 인명부
자료의 내용
甲辰年 11월에 작성된 비안향교 〈儒案〉이다. 입록된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서 작성연대는 1664년임을 확정할 수 있다. 문서에는 액내교생 35명과 액외교생 24명 등 총 59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안향교의 법제화된 향교정원은 30명인데 본 문서가 작성된 17세기 중반에는 액내교생만으로도 정원이 넘어선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액내의 경우 비안향교의 운영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 양반들의 자제라고 볼 수 있으며 액외는 서얼 혹은 평민의 자제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액내는 金씨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張, 禹, 鄭, 卞, 朴, 李씨 등이다.
본 문서에 드러나는 사실은 유안에 등재된 이들의 인명만을 기록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이들의 신분적 차이를 명확하게 설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비안향교에 보관된 인명록의 성격을 가진 동몽안, 청금록 등과의 비교를 통해서 정리할 수는 있다. 비안향교에는 ‘校生案’이 없어 일반적으로 향교생도가 양반사족으로 구성된 儒生과 일반평민층으로 구성된 校生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거쳤는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유안, 청금록을 액내와 액외로 구분하거나 1, 2秩 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결원이 생겼을 경우 追錄을 통해 보충하였다. 등재인원의 수는 文件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17세기 중후반의 4건의 문서에서는 액내에 30~35명, 액외에 19~28명으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의 군현에는 향교가 설치되었고 향교의 생도에게는 여러 혜택이 부여되었다. 그 가운데 군역면제는 가장 큰 특전이었다. 또한 서원이 건립되기 전 향교는 향촌사회내 유일한 官學의 장일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제반문제를 논의하는 하나의 향촌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의 양반사족들은 향교출입을 통해 향촌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그들의 신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상층평민의 향교입교 또한 점차 증가하였는데 앞서 언급한 군역면제라는 특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신분을 상승,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 또한 적극적으로 향교에 입교하였다. 평민층의 입교가 증가하게 되자 양반층은 액내로, 평민층은 액외로 구별되어 갔다.
비안향교의 경우 교생의 명단을 기록한 문서들이 대부분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의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대강을 살펴보면 액내와 액외로 구성을 하거나 동재유안이라 하여 동재에 소속된 이들을 따로 유안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청금록을 따로 작성한 것으로 보아 유생들의 명부만을 따로 분절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향교교생으로서 액내와 액외만으로 구분짓던 인명부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비양반층의 입록을 구분 짓기 위해 유안이라 칭하던 것을 청금록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롭게 작성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다.
비안현의 姓氏는 比屋에 朴, 孫, 袁, 張과 來姓으로 鄭, 羅氏가 있었고 安貞에 吳, 林, 羅, 朴氏와 續姓으로서 김씨가 있었다. 그리고 新坪에는 속성으로서 彭, 黃, 林氏 외에 卞, 張, 金, 鄭, 禹氏 등이 있었다. 본 문서에서도 액내 金씨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張 8명, 禹, 鄭, 卞, 朴 각 3명, 李 2명, 權 1명이고, 액외는 김 14명, 정, 南, 郭 각 2명, 우, 박, 林 각 1명 등이다. 이러한 인적구성의 분포는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비안향교의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성씨를 보여주는 1673년 향안의 성관을 보면 張이 12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李 8명, 卞 5명, 金 2명, 朴 1명 등으로 본 문서에 입록된 인물들의 성관과 크게 다른 점은 金씨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이 드러난다. 물론 두 문서의 작성시기가 약간 차이가 나며, 문서의 성격이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18세기 초반에 작성된 향안 改修에 관한 논란을 통해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을마다 양반상호간의 서차와 주도권 쟁탈전이 매우 격화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성관 분포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중반에 작성된 비안향교 유안으로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향교교생 관련 인명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당시 비안향교 운영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비안향교에 소장된 교생관련 인명록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의 것들로 집중되어 있는데 본 문서를 통해 당시 비안향교의 인적구성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고, 비안의 재지적 기반을 갖춘 사족들의 변화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17세기 중반의 임진, 병자의 양난을 거치면서 변동되는 비안지역의 성씨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