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비안향교(比安鄕校) 도유사행임록(都有司行任錄)으로 비안향교 도유사 역임자들의 인명을 기록
자료의 내용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비안향교 〈都有司行任錄〉으로 당시 도유사 역임자 120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도유사는 향교 운영의 총괄을 담당하는 校任으로서 당시 비안향교 운영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문서에 작성연대를 기입하고 있지 않지만 입록된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여타의 도유사 행임록을 통해서 대략 188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유사는 鄕校 校任 중 首任으로 보통 지방 유림의 公議를 거쳐 薦望을 하면 수령이 결정하는 형식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향교가 官學으로서 수령의 일정한 영향력 하에 있었지만, 지역 내에서 德望있고 文行이 있으며 나이가 많은 인사를 지역 유림의 공론을 통해 임명하는 자치적 성격이 더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에는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중앙에서 파견된 敎授, 訓導 등 교관이었고, 이들은 향교의 원활한 역할 수행을 위해 校生 가운데에서 대표를 선발하여 향교의 운영과 활동을 돕도록 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와 지방에서 선발된 교생들이 향교운영의 실질적 권한을 담당하던 것이 향교교육이 점차 쇠퇴하고 교수, 훈도직을 꺼리게 되는 현상과 동시에 사회적 지위도 낮아지는 시점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교관의 파견은 지속되지 않게 되고 이에 향교는 지방 수령의 관할 아래 향교의 유생대표들이 실질적 운영주체가 되었다. 향교의 유생대표들을 校任이라고 하였는데 향교에 따라 그 구성에 있어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都有司, 掌議, 有司의 체제로 확립되어 있었다.
한편 향교에 따라서는 도유사가 없이 장의가 수임인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간혹 수령이 일시적으로 도유사를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단지 예외적인 현상이었고 기본적으로 영남지역의 경우 도유사 1인, 장의 2인, 유사 2인 체제가 일반적이었고, 본 문서에도 각 해에 해당하는 도유사를 지칭하여 표기하지는 않았으나 비안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문서를 통해 살펴봤을 때 1인의 도유사 체제가 문서 작성시기인 19세기 후반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유사는 대외적으로 향교를 대표하며, 전 교임을 총괄하면서 향중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였다. 본 문서에서는 도유사의 역할에 대한 직접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현전하는 여타의 향교의 도유사 관련 문서를 통해서 살펴보면 도유사의 역할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도유사는 교중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 교중 典穀의 經用, 出納은 장의나 전곡유사가 담당하였을 것으로 사료되나 그 會計는 도유사의 승인이 필요하였던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둘째, 도유사는 교임 및 교생 등에 대한 임명, 감독, 처벌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향교의 각종 임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장의, 유사 및 교생은 도유사가 定出하였고, 인사 관련 사안에 대한 처분에 관해서도 도유사가 주도적으로 처분하도록 하게끔 시행되고 있었다. 셋째, 향교의 교육기능 보다 제례기능이 두드러졌던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도유사는 주 임무였던, 春秋로 거행하는 釋奠祭, 매달 초하루, 보름에 행하는 朔望焚香 등 제례를 주관하였다. 이는 도유사뿐만 아니라 교임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였는데 각 향교에서는 교임과 유생이 주관이 되어 각종 제례를 준비하고 수령과 함께 또는 그들만으로 祭官이 되어 제례를 거행하였다. 이렇듯 도유사는 향교의 실질적인 책임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직임을 자주 교체할 수는 없었으나 이 또한 18세기 중반이후가 되면 그 체직기간이 현격하게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본 문서에서도 그 체직기간을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많은 인원이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입록현상을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지만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서는 더 이상 향교가 향촌유림의 공동체로서나 향촌자치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그 성격이 현저히 감소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즉 향교의 운영이 교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보여지지만 그 역할에 있어 다만 享祀만을 주관하는 제관의 성격을 띠는 역할수행에 있어서 그 비중이 줄어드는 것과 의미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 향교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던 도유사의 인명과 비안 지역의 사족들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도유사는 향교 校任 중 首任格으로 지역 내에서 덕망과 文行을 겸비한 인사를 지역 유림들의 公論과 薦擧를 수령이 결정하여 임명되었던만큼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로서 본 문서가 작성될 당시에는 도유사를 비롯한 교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시기였지만, 비교적 최근의 비안향교 도유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도유사를 선점했던 성씨의 분포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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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비안향교 〈都有司行任錄〉으로 당시 도유사 역임자 120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도유사는 향교 운영의 총괄을 담당하는 校任으로서 당시 비안향교 운영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문서에 작성연대를 기입하고 있지 않지만 입록된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비안향교 소장 여타의 도유사 행임록을 통해서 대략 188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