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년대 비안향교(比安鄕校) 청금록(靑衿錄)으로 비안현 청금유생 41명의 인명을 기록한 문서
자료의 내용
丁未年 2월에 작성된 비안현 청금유생들의 인명을 기록한 〈靑衿錄〉이다. 정미년은 1727년인데 반해 문서 서두에 ‘雍正 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726년에 작성된 것을 수정한 것인지, 첨록된 것인지에 대한 여타의 부기된 사항이 없어 명확한 작성연대를 알 수 없다. 본 문서에는 총 41명의 인명만이 기록되어 있어 앞서 작성된 비안현 청금록에서 액내와 액외 등으로 구분한 것과 같은 구성은 보이지 않는다. 문서 말미에는 현감과 별유사, 장의, 유사 등의 성과 수결을 하였다.
비안향교에는 현전하는 校生案이 없으며 儒案, 靑衿錄을 額內, 額外로 구분하거나 第1秩, 2秩로 나누어 기록하는 등의 문서가 남아 있다. 그리고 결원이 발생하였을 경우 追錄을 통해 보충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등재인원의 수는 文件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1664년부터 1683년까지 작성된 4건의 문건에서는 액내에 30~35名, 額外에 19~28명으로 비교적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700년에는 액내, 외의 구분 없이 56명이 등재되었고, 1714년에는 제1질 74명, 제2질 34명으로 도합 108명이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본 문서에는 41명이, 1767년에 작성된 청금록에는 115명이 수록되어 그 수를 종잡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겪게 되는 영남 남인계열의 입지변화와 사회, 신분제의 변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대체로 17세기 말 이후가 되면 영남 남인계열의 及第나 중앙정계 진출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양반신분의 유지를 위한 비교적 용이한 방법으로서 청금록 등으로의 등재를 갈망하게 되는데 본 문서가 작성된 18세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고착화되어가는 시점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중앙 관직에서 멀어진 재지사족들의 향족화현상과 농업에 있어서의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편승하여 일정한 富를 축적한 계층의 형성되는데 경제적 부를 축적한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鄕案, 嬌顔 등에 입록함으로써 새로운 양반신분으로 부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서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鄕任으로 진출함으로써 기존의 士族과 더불어 향권을 다투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는 이 시기 강화된 수령권의 비호가 컸다. 이러한 사정은 지역에 따라 시기적인 편차가 있을 뿐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기존의 양반을 舊鄕이라고 하는데 비해 이들 신흥세력을 鄕品 또는 新鄕이라 한다. 비안을 비롯한 영남지역은 전통적으로 사족의 기반이 강해서 이러한 변화가 여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지만 한편으로 仁祖反正 이후 甲戌換局, 戊申亂을 거쳐 노론 전제정치가 성립되면서 관료로의 진출이 차단되자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보수적으로 대처하였다.
영남지방은 일찍부터 양반권위의 상징이었던 향안, 院案, 교안의 입록에 있어서 中人, 庶孼을 배제시켜 그 배타적, 보수적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었지만 신향의 도전이라는 일반적인 추세를 막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일반적 경향에서 작성되기 시작했던 것이 사족들만을 입록하는 청금록이다.
본 문서에 나타나는 인명만으로는 당시 비안지역에서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성씨들의 구성만을 살펴볼 수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비안향교 교임들의 명단을 기록한 都有司 및 掌議 등의 행임록 등을 살펴볼 때 교임의 성관 분포와 청금록 입록자의 성관의 비중이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인 18세기 초, 중반까지는 향촌사회의 중요 기구로서의 향교의 직임을 전담하였던 계층과 청금록 입록자의 인적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에 입록된 성씨는 모두 7개 성씨로 張氏가 11명으로 가장 많고, 卞 9명, 金 6명, 鄭 5명, 朴·李 각 4명, 禹·權 각 1명 순이다. 이는 앞서 작성된 1701년과 1714년의 청금록에 입록된 인원들과 전체 입록수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어 직접적인 비교를 할 수 없으나 주요 성관으로서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金, 張, 鄭, 卞이 주를 이루고 있어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비안현에서 청금록이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한 시점의 문서와 비교해 주요 성관의 분포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18세기 초반의 비안현의 주도세력이었던 사족들의 성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비안향교에 현전하는 인명관련 문서가 집중되는 시기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중반에 해당되는 자료로서 비안현의 사족의 구성 분포가 변화하는 과정에 작성된 것으로 비안현의 사족들의 족적기반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