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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음나선생병자난호성행적(梅陰羅先生丙子亂護聖行蹟)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G.0000.4725-20150630.Y153211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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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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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내용분류: 사회-역사-역사기록
작성주체 상주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형태사항 크기: 31 X 21
수량: 7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안내정보

매음나선생병자난호성행적(梅陰羅先生丙子亂護聖行蹟)
이 자료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성균관(成均館)에 있던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현(先賢) 위패를 위험으로부터 지켜낸 나이준(羅以俊)·정신국(鄭信國)·박산미(朴潸美)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각종 『군지(郡誌)』,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자료에 나타난 이들의 행적을 가려 뽑아 놓은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 이들의 행적과 이후 이들에 대한 보상 등이 주 내용이다. 나이준영천(榮川, 현재의 영주) 출신으로 문과급제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한 학자였으며 정신국박산미성균관을 관리하는 수복(守僕)이였다. 병자호란 당시 이들의 노력으로 위패는 안전히 모셔질 수 있었으며 이후 국가에서는 이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이들의 행적을 문서로 작성, 배포함으로써 타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나이준(羅以俊), 정신국(鄭信國), 박산미(朴潸美)의 행적을 초록한 책
내용 및 특징
『梅陰羅先生丙子亂護聖行蹟』은 羅以俊鄭信國, 朴潸美의 행적을 抄錄한 것이다. 작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18세기 말기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명에 나타난 梅陰 羅先生은 조선시대 학자인 羅以俊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본관은 壽城, 字는 宅于, 號는 梅軒이며 祖父는 世謙, 父는 瑢이다. 1635년(仁祖 13) 司馬試에 합격하고 1646년(인조 24) 式年文科에 丙科로 及第한 바 있다. 그리고 자료의 내용 중에 확인되는 정신국박산미成均館의 守僕이었다. 『매음나선생병자난호성행적』은 『榮川郡誌』, 『泗溪地誌』, 泗溪書堂 기록, 『國朝寶鑑』, 『太學成典』 등에 나타난 그들의 행적을 초록한 것으로 특히 丙子胡亂 당시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행적에 나타난 그들의 공적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636년(인조 14) 丙子胡亂이 발발하자 太學의 諸生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으나, 나이준은 당시 聖廟를 지키던 守僕인 鄭信國朴潸美와 함께 큰 자루를 만들어 聖賢의 位牌와 祭器 등을 모두 담아 도성을 나왔다. 이후 南漢山城에 당도하자 인조는 크게 기뻐하고 米布를 하사하여 그들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그들이 수호한 위판은 開元寺에 모셨으며 丁丑年(1637) 還都 후 다시 위판을 받들고 귀환하였다. 이후 정신국의 경우 旌閭가 내려졌지만 나이준에 대한 포상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羅直洙(나이준의 5대손)와 지방 유생들의 건의에 따라 1774년(영조 50) 贈職되었으며 그를 배향하던 泗溪書堂은 書院으로 승격되었다. 그와 함께 위판을 수호한 정신국은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들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하여 胡亂 후 품계가 내려졌으며 사후에는 旌閭가 세워졌다. 그의 후손 또한 계속 守僕의 임무를 맡았다.
『매음나선생병자난호성행적』은 이상과 같이 병자호란 당시의 나이준, 정신국, 박산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 나이준榮川(현재의 榮州) 출신이며 그를 제향한 사계서원 역시 영주에 위치하고 있다. 榮川 출신으로 상주와의 인연이 확인되지 않는 그의 행적이 상주향교에 현전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 다만 향교의 상징과도 같은 孔子와 先賢의 위패를 이들이 수호했다는 점을 널리 본받기 위해 이러한 기록이 전해진 것이라 생각된다.
자료적 가치
『매음나선생병자난호성행적』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나이준을 비롯한 정신국, 박산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단편적이지만 나이준을 배향한 사계서원의 변천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開元寺
자료에서와 같이 나이준 등이 난리를 피해 수호한 위패를 옮겨 모신 곳이다. 開元寺는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의 남한산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확인 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관리들이 머무르며 왕실의 안녕을 비는 五糾正所의 한 사찰이었다. 개원사 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승군 본영이 있었던 곳으로 碧巖 覺性 禪師가 南漢總攝이 되어 승려들을 지휘, 남한산성을 축성하였다. 이후 軍器·화약·僧兵이 집결한 승군의 본영이 되었으며 수도를 방어하는 호국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산성내 무기수거와 화약 폭파 사건으로 인해 부속건물들이 모두 전소되어 폐사되었다. 1976년 대각전, 요사 등의 건물을 신축한 후 면모가 일신되었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泗溪書院
사계서원의 전신은 사계서당으로 1654년(효종 5) 榮川郡(현재의 榮州) 望闕里에 건립되었다. 1720년(숙종 46) 유림의 公議로 조선 중기의 학자인 黃孝恭을 배향하였고 이후 나이준을 함께 배향하였다. 1774년(영조 50) 나이준에 대한 贈職과 함께 사계서당도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景賢祠·興敬堂·東齋·西齋·神門·廚所 등이 있었으나 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고 복원되지 못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國朝寶鑑』,
1차 작성자 : 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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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梅陰羅先生丙子亂護 聖行蹟
榮川郡
羅以俊壽城人司馬文科官至司諫淸行自修晩節恬退丙子亂館中諸生一時
波散獨奉 五聖位權安于南漢城 行在所
泗溪地誌
羅以俊字宅于本壽城榮川號梅陰 崇禎八年 仁庙朝乙亥中生員
試遊太學丙子冬淸兵逼城 上■南漢館中諸生一時波散公獨處胤
從容與同知數人及典僕鄭信國理安從祀位版於凈處奉 五聖位赴出
城門胡騎塞路不得行公大聲■曰 文宣王位版在此胡騎皆下馬開路
遂達南漢權安于 行在所
乙酉登文科官至弘文館校理出寧■山淸白爲治郡人追思立碑 今
上英乙丑弘文館副提學
泗溪書堂
再去癸未士林創建書堂以羅公學行師表後世立祠奉安春秋常享祝文曰
迹避榮利行著謹梁存心律己俱有本末又以同郡故司諫龜巖黃公孝恭
深於易學見弊於退陶李先生乎生學行爲後人矝式同時幷享春秋常
享祝文曰心安丘壑學究河洛遺風不泯後人是則
英廟甲午以梅陰護■聖功始■贈職 今上己亥仍太學通文陞號爲

國朝寶鑑
英宗丁未旌太學典僕鄭信國朴潸美閭先是丙子亂起太學諸生皆奔選
四淸獨信國等器入 聖廟先奉東西廡 位版及祭器樂器座于明倫堂後
二人背負 五聖十哲位版而進士羅以俊具巾服倍入南漢 仁祖嘉
賞列朝累加褒弊■是 上聞之特命旌閭
太學成典
鄭信國朴潸美者太學守僕也 崇禎丙子虜犯京都 大賀入南漢時
太學諸生皆波散獨進士羅以俊信國潸美作布帒盛東西廡位版及祭器
樂器座明倫堂北奉 夫子四聖十哲位版兩人分負號馬請羅以俊具巾服倍
行達南漢 行在翌日 上聞而嘉之特賜米布權安位版開元寺時進
士來會者六人設食堂守 位版如在太學時丁丑 大賀還都信國奉 位
版以還倍行者學官李植尹■申敏一朴亨遘李櫓崔夢旭李鄗生員金
克譓士人尹之元上特賜羅以俊寢節命兌信國潸美信國願守
直夫子廟不欲兌役 上從其意 今上英廟丁未回典僕等上言命旌
表其門羅以俊後孫學川家多有當時事蹟云 今考梅陰大科榜目則書以 生員盖有 承傳而未及擧行
丙子亂護 聖廟時同行錄 騰出於信國從孫家○信國亂定後以護■功
特家恨已身差定守僕之位其子就立亦世聚
之又命加負其文子嘉義大夫逐朔給祿科以弊之又仍館僕之上言特命旌閭又壑爲祭閣
■■春秋給祭需祀享以成事蹟作成一冊多不益鷹只勝出行蹟同行錄及其大槩■…■
進士羅以俊
守僕鄭信國
朴潸美
鄭信國傳與記及信國護 聖錄大槩皆云丙子之亂出於倉卒時諸生方入
食堂自坊外有小札傳急報諸生皆倉黃踰越食展猶恐或後蹂■四散
羅以俊進士獨留信國請羅進士巾服陪行云云
會按太學成典回信國護聖錄及館僕上言文而修選之故專主於信國而
梅陰則有若聽從信國者然此則大不然豈有一館諸儒投著越布奔選
四散之際挺然■留之正士必待信國之言而後始知護 聖廟之道乎信
國則亦僕肆中知義者而以梅陰之隨從下人 列聖朝屢家 天褒
又旌表其門自甲寅給祭需便首儹等每於春秋祭祀之又錄其子孫世
■典僕朝家之於二首僕其報賞之典可謂至矣盡謙而獨梅陰
則以主管持使之進士當時有寢節之命而未及擧行平柱不自言功登
第後玉署■院皆非錄舊功承別恩者以子孫之遠居窮鄕尙今泯設其
後數百年五代孫羅直洙 初名宅洙 聞首僕旌表事乃與士林啇議自丁
丑至甲午前後十八年內呈書於本官本營及春曹凡十餘次而一
未 上聞甲午春夏直洙留京累朔以此意帖呈春曹 依儒生呈
舊果筵達始以護 聖庙功贈吏曹參判弘文館提學伊時褒典降也士
林皆以爲以遠外羈旅之先輩有學行己立祠今仍■思誥之降而當發
通道內乃聚自協謀其年寧海鄕鮮時多士始發通文果於己亥冬
仍太學通文以泗溪書堂陞爲泗溪書院
右預宮丙亂時梅陰羅先生護 聖事蹟也京鄕公私文字凡若干篇太
學成典及首僕傳則主鄭信國而援據於先生噫鄭朴兩人旣於許多
首僕奔選四散之際獨留不去效力於護 聖則前後旌褒可謂無城成傳
及首僕傳出鄭朴子孫之言文字太史氏回■■成篇則主鄭朴爲言者
亦其宜也梅陰後孫之果次■寃非欲與鄭朴兩首僕較計擬議而据
實考蹟自有所不客泯黙者何以言之護■聖之功古無其名丙子亂乃
千古所未有之變故先生有千古所未有之變樹立食捲堂越布四敬之際確
然不■挺然自守不失三代之威儀倉黃造次間居洋宮而守洋齋
隨所遇而盡所職奉護 位版謁誠惠衡目無滿城之胡騎而只見
聖庙之爲守則先生義勇固所優爲而又何待於人之請乎張有請先
生若義勇則其能之乎當此之時國勢岌嶪冠屢側置方有論胥
爲夷之慮 聖廟位版阽危於槍■汚衊之際公惟奮不顧身裁力
奉護如衛父兄■■目而已又何假念於他日還奉 廟貌如故者
乎及其賊退圃鮮天不喪文之後始可言功也况兩守僕之累次褒典
旣以護 聖爲功則梅陰之樹立宜在於功宗兄犯之科而年前
思贈之擧猶不如守僕之旌門錫祭豈耶 朝家之尙有欠典而士林之
所共柳鬱郁泗溪院享本郡士林邱公德行俎豆於鄕回而非以護
聖之功會■朝家賜號也昔宋之白鹿洞唐處士李渤隱居遺址
也當日敎授生徒言論風止日曺不少槩見而猶爲宋夫子所闡
揚至請效額頌籍遂有名於天下後世况梅陰公樹立功在 聖庙
安文成公後一人耶伏望道內內僉君子必將激昻感慨峻發
公議據据古今又取考護 聖時事蹟京鄕公文書以士林泗溪私
之院敢請設疏請額之擧果豪 宣賜之恩則此實士林之
幸而尤有光於右文衛道之萬一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