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년 선산향교(善山鄕校) 명륜당중창기(明倫堂重刱記)
자료의 내용
기묘년 閏4월 初8일에 작성된 선산향교 〈明倫堂重?記〉로 명륜당, 一柱門, 廚房, 養賢堂의 중창 등에 관련된 공사 내역과 소요비용의 세부사항을 기록하였다. 기묘년이 정확하게 몇 년인지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나 기록이 부기되어 있지 않아 작성연대를 알 수 없다.
선산읍지에 의하면 이곳은 본래 신라 一善郡이었으나 眞平王때 州가 되어 軍主가 다스렸다. 神文王때 廢州하였고 景德王때 嵩善郡으로 고쳤다. 고려 成宗 14년(995) 善州로 고쳐 刺史를 두었으며 顯宗 9년(1018) 尙州에 소속시켰다. 仁宗 21년(1143)에는 一善縣이 되고 현령을 두었다. 뒤에 知善州事를 두었다. 조선 太宗때 善山都護府가 되었다. 본 향교는 조선초에 창건되었다고 사료되지만 정확한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1600년에 府使 金湧이 大成殿 5楹, 東·西? 각 3楹, 神廟를 지었으며 1623년에는 부사 沈倫이 明倫堂 5間, 東·西? 각 3간, 南樓 7간, 서쪽에 敎官衛, 典祀廳, 廚庫를 지었다.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靑莪樓 등 크게 3棟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공사범위는 명륜당의 중창과 丹靑·繪畵, 一柱門 新立, 廚房修葺, 養賢堂 重? 등이었다. 工匠, 단청 등의 物用은 古例에 의거하여 校生의 부조금을 禮房이 踏印하고 수봉케 했다. 교생 70명 가운데 2명은 처벌에 의해 降定되어 제외하였고, 1명은 전에 이미 願納으로 免役되었으므로 제외하였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남은 67명 每人에게 2냥을 수봉하면 134냥이 되지만 8명은 매우 가난하여 특별히 1냥을 감하게 되어 실제 부조금은 126냥이다. 여기에 西內退項 李日得의 원납전 30냥과 官備錢 17냥 1? 7分이 더해져서 도합 173냥 1전 7분이 마련되었다. 이 돈의 지출항목은 총 21가지인데 공장의 임금을 비롯하여 담뱃값, 술값, 고사비용 등 모든 비용을 합하면 당초에 모은 돈이 모두 지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材木記를 보면 浮橋木은 金烏書院이 보내오고 나무 8株의 경우 교촌 국내에서 재임이 분부하여 베어오고, 서까래 10개와 부교목 2개는 산성에서 베어 오도록 분정하고 履木이 臂丈보다 더 큰 것 100개는 淫長의 兩處山에서 나누어 베도록 분정하고, ??木 脛만큼 큰 것 12개는 도개 法波山에서 베어오도록 분정하였다. 또 이 공사에 드는 역정 258명은 교촌민이었는데 문기 末尾에는 色吏 金光浩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一善志』 고적조에 의하면 ‘선산부의 해평고을에 관아 및 향교, 사창 등 舊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 고려때 해평현의 남은 자취가 없어 정확한 구지는 미상이다. 문헌에 따르면 해평현이 선산군에 來屬된 후 폐하였으며 국초에 고을사람의 청으로 옛터에 향교를 세울 것을 부사 李吉培가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조정에 알려 다시 세워졌다. 그 후 한 고을에 두 향교는 자고로 그 예가 없다고 하여 장차 폐하려던 차에 임진병화로 훼폐되었다. 왜란 후 縣人이 부사 成普善에 청하여 1608년 그 곳에 서당을 세웠으나 지금은 없다. 鄭麟趾의 記事에 "옛날은 집에 私塾이 있고 黨에 私庠이 있어서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말세에 이르러 학교의 정사가 해이하고 庠序의 제도가 퇴폐하였다가 본조에 이르러 다시 문화가 발흥하여 주부군현이 학문을 숭상치 않는 이가 없었다. 해평이 선산의 부현이 되었으나 일찍 학교가 없었고 本府까지는 강하를 건너야 하며 20여리 먼길에 배우는 무리의 내왕이 곤란을 겪어오던 바 이제 부사 이길배가 재직 1년에 폐단을 일신하였으며 ?宇樓址가 모두 깨끗하게 중수되었으니, 부역에 백성을 넣지 않고 재목을 산림에 구하지 않아 고을 사람이 신기하게 치하하였다, 하루는 향리의 張替先生 등 백여인이 부에 이르러 廢寺의 재목과 기와로서 향교를 다시 세울 것을 청하거늘, 부사가 기뻐하며 감사 李繩直에게 알려서 마침내 蒙允을 얻었다. 이에 鄕里의 父老들이 役軍을 내어 불과 수개월에 준공을 보았다. 그 제도는 聖殿이 3동이고 동, 서무 또한 각 3동으로 겨울은 따뜻한 방이 있고 남루 4간은 여름에 시원한 곳을 이루었다. 廚庫와 垣墻도 구비되었다. 또 명년에는 못을 파서 논의 관개에도 편의를 돕는 바 있다 한다. 前敎導 金英發 및 생원 吉久로 하여금 學長을 삼아 학도 30여인이 수학한다는 바 詩書의 가르침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여 건물의 규모 등을 미루어 보아 본 문서에 드러나는 공사의 범위를 보아 17세기에 중창된 선산향교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다시금 중창되는 시점에 작성된 문서로 보인다. 또한 선산향교의 교생명단을 보여주는 17세기의 향안 등에도 약 70여 명 안팎의 교생들이 입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17세기 중반 경에 이뤄진 향교 건물의 유지보수를 위해 시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자료적 가치
선산향교 부속 건물의 중창 등에 관련된 공사 내역과 소요비용의 세부사항을 기록한 문서로 선산향교의 변천의 일면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본 문서를 통해서 중창에 관련된 비용 충당 문제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고, 지출항목에 대한 세부사항도 기입하여 후일 있을 수도 있는 문제점 및 보완점을 구비하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주요 소재가 되는 목재사용에 관한 부분의 분정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한 것이 주목된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