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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의성(義城) 속수단소(凁水壇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F.1948.4773-20150630.Y151101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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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속수단소,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
작성시기 1948
형태사항 크기: 70.5 X 51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1948년 의성(義城) 속수단소(凁水壇所) 통문(通文)
1948의성 속수단소에서 옥동서원으로 구당 조목수(1736~1807)의 불천위 종사에 대한 의견을 묻는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목수의 불천위 종사를 위해 속수단소에서는 단장 류도징 외 33명이 연명하여 보냈다. 통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덕을 숭상하는 것은 제사지내는 곳을 여럿이 함께 존경하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하며, 5대가 되어서 묘소로 옮겨야 되는 위패를 보존하는 것은 자손이 죽은 이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조목수의 혈통과 학문 및 행동이 불천위로 모심에 부족함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즉 임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검간 조정(1555~1636)의 후손으로 유업을 이어받아 저술하고, 성현의 전모를 연구하여 몸으로 체득하고, 행동으로 추진하였는데 학식이 높아 상산 삼로 중 한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학행이 세상에 모두 알려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는 상주에서 평생 은거한 그의 삶으로 인해 그에 대해 모르는 자들이 많아서 혹 그를 불천위로 모시는데 반대가 있을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통문에서는 조목수를 불천위로 모시는데 자격이 충분함을 강조했다. 뒤이어 그의 후손이 지금 세대가 번갈아들어 5세가 되었기에 그의 위패를 옮겨야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장소의 도리를 헤아리고, 위패를 보존하는 규정에 합치되는 것으로서 별도로 봉안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조목수의 위패를 별묘에 봉안하려는 뜻을 거듭 글로서 알리니 여러 선비들은 속히 돌려보고 큰 의식에 더욱 힘을 보태주길 당부하고 있다. 현재 풍양조씨 오작당 내의 가묘에 조목수의 위패를 불천위로 모시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 유림들의 공의로 원만히 일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常變通攷』, 柳長源,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48義城 凁水壇所에서 玉洞書院으로 舊堂 趙沐洙의 不遷位 從祀에 대한 의견을 묻는 通文
1948의성 속수단소에서 玉洞書院으로 舊堂 趙沐洙(1736~1807)의 不遷位 從祀에 대한 의견을 묻는 通文이다. 이 통문은 구당의 불천위 종사를 위해 속수단소에서는 壇長 柳道徵 외 33명이 연명하여 보냈다. 상주가 아닌 의성속수단소에서 통문을 보낸 것은 풍양조씨가 세거하고 있는 상주 중동면 일대가 단소 부근에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불천위의 선정 대상은 국가에 큰 공을 세워 국가를 보존한 인물이거나, 한 사람이 이룬 학문과 업적이 한 계통과 이론을 형성하여 후세를 빛낸 공로자 내지 평생의 업적이 가문의 후손에게 榮譽와 龜鑑으로 남는 경우이다. 즉 불천위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鄕村이나 門中, 士林 나아가 온 백성들에게 공경을 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불천위로 인정되는 시기는 원론적으로는 그 인물이 사망한 직후부터 시작하여 3대, 4대 봉사와 같은 일반적인 忌祭祀의 봉사대상에서 벗어나기 이전 시점에 이루어진다. 18세기 이후 宗法질서가 잡혀가면서 從祀범위가 확대되어 양반가에서는 4대 봉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親盡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은 조목수가 봉사자의 5대조로서 遞遷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즉, 위패를 땅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천위는 4대 봉사와 달리 세대가 초과하여도 神主를 매장하지 않고 참례자가 그 조상의 當代만이 아니라 초세대적 堂內로 이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결국 불천위 선정에 필요한 것은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자로서 사림의 公論에 의거해야 했다. 그래서 조목수의 위패가 친진되는 시점에 이르러 그의 불천위 선정에 대한 공론을 형성하기 위해 통문을 통해 사실을 알리고, 여론을 결집하려는 것이다. 본문에서 德을 崇尙하는 것은 祭社를 여럿이 함께 尊報하는 것이라고 하며, 親盡하는 위패를 보존하는 것은 자손이 追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조목수의 혈통과 학업 및 행동이 불천위로 모심에 부족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 임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黔澗 趙靖의 후손으로서 葛菴 李玄逸(1627~1704)의 문인이자, 孝行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立齋 趙大胤(1636~1705)이 그의 高祖이며, 증조 疏軒 趙瀣와 조부 中厓 趙時經(1686~1755)은 當代에 學行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아버지 存省齋 趙錫愚(1721~1760)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당숙 靜窩 趙錫喆(1724~1799)은 淸臺 權相一의 문인으로 學行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목수 역시 학업으로 이름이 더 높았는데, 어릴 때부터 그의 조부에게 글을 익혀 經術과 문장이 깊고 넓었으며, 당대 사림을 이끌어 斯文의 表準이라고 할 만큼 추앙을 받았다. 조목수의 호인 구당은 현재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2호인 悟昨堂의 堂號이기도 하다. 당호를 ‘舊堂’이라고 한 것을 스스로 밝히기를 "이 집은 지은 지 110년이 되었는데 선조의 옛 집을 옮긴 것으로 先祖의 舊業과 舊風을 잘 지키고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오작당이라 칭한 것은 예전 󰡔小學󰡕에 "小學書中悟昨非" 즉, 지난날의 잘못을 소학을 읽고 깨달았다는 글에서 취한 것이다. 특히 1786년에는 蒼石 李浚, 청대 권상일을 이어서 󰡔商山誌󰡕를 편찬하기도 했다. 조목수의 이러한 학문연원을 통문에서는 검간 조정의 후손으로 遺業을 이어받아 저술하고, 聖賢의 典謨를 探討하여 몸으로 체득하고, 행동으로 추진하였는데 학식이 높아 商山三老 중 한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학행이 세상에 모두 알려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는 상주에서 평생 은거한 그의 삶으로 인해 그에 대해 모르는 자들이 많아서 혹 그를 불천위로 모시는데 반대가 있을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통문에서는 조목수를 불천위로 모시는데 자격이 충분함을 강조했다. 뒤이어 그의 후손이 지금 세대가 번갈아들어 5세가 되었기에 그의 위패를 親盡해야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장소의 도리를 헤아리고, 위패를 보존하는 규정에 합치되는 것으로서 別奉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구당의 위패를 別廟에 봉안하려는 뜻을 거듭 글로서 알리니 여러 선비들은 속히 돌려보고 大禮에 더욱 힘을 보태주길 당부하고 있다. 현재 豐壤趙氏 悟昨堂 내의 家廟에 조목수를 불천위로 모시는 것으로 보아 당시 公議로서 원만히 일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이래로 서원·사우의 건립, 문집의 발간, 효자·열부 등의 정려, 불천위 종사 등과 같이 조상을 宣揚하려는 사례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통문은 상주 오작당의 불천위 선정 과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常變通攷』, 柳長源,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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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德崇而祭社公共之尊報也親盡而藏主子孫之追慕也皆由往哲之遺風餘烈永世難諼而我東諸
先輩之講明而遵行者也惟我 舊堂趙先生黔老之聞孫承述箕裘之緖業探討聖賢之典謨體之於身推之於行
蔚然爲商山三老之一也惟是與世不諧遯肥林泉不能展布其所蘊而後學之尊仰不可以一時之顯晦而有所輕重矣
今其後孫世迭親盡然其綿綿之澤愈久不泯不可槩以五世而斬之也揆以祭社之義藏主之典合有別奉而崇報故玆敢聯
章仰告伏願 僉尊亟賜回示俾敦大禮千萬幸甚
右文通
玉洞書院
戊子十一月初三日凁水壇所壇長柳道徵
有司 金誠在
公事員 金永羲
鄭柱畿
曹司 柳完植
孫哲秀
製通前參奉鄭東冕
寫通 全胤錫
會員柳廷佑
鄭東佐
李鍾麟
柳道泳
金秉健
金永一
孫炳卓
鄭在喆
李時和
鄭畿文
康炳憲
李舜敎
琴九淵
金台賢
孫炳參
琴秉直
南仁鎬
申相允
柳雨植
宋柱元
金龍鐸
金相圭
李志寧
韓宅煥
金龍赫
金炳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