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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하양 금호서당(琴湖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F.1923.4729-20150630.Y15110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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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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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금호서당,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30.5 X 40.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1923년 하양 금호서당(琴湖書堂) 통문(通文)
1923년 5월 10일, 금호서당부곡으로 옮겨 건축한 후 경암 허조의 현판 게액과 위판 봉안례를 거행하니 기한에 맞춰 옥동서원에서도 참석해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이 통문을 보면 훼철된 상태로 이어져 오다가 1923년 봄에 금호서원을 영건하기로 의논하고서, 옛 서원터가 궁벽하여 영건하기 마땅치 않으므로 부곡으로 옮겨 짓기로 하였다. 이건하는 서원의 5리 떨어진 허곡은 자손들의 세거지이며, 허조의 아들 정간공 허후와 손자인 응천 허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충각의 부근이라고 하였다. 금호서당 명의로 발급된 이 통문에서 도유사 진사 정홍묵 등은 5월 20일에 위패를 봉안하고, 다시금 서원의 현판을 달 계획이니 날에 맞춰 도내 유림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길 요청하였다. 서당이란 명칭으로 통문을 발송한 것은 아직 위패를 봉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통문이 발송되기 이전에 하양에서는 두 곳의 금호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동일한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한 고을에 같은 이름으로 두 곳에 건립되는 문제로 하양의 유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23년 2월 26일 금호서당 도회에서 옥산서원로 보낸 통문을 보면 허조의 후손이 훼철된 금호서원를 복원했는데 또 다른 허씨가 금호서원이란 편액을 내건데 대해 성토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보다 자세히 보면 와촌에 사는 허씨가 또한 후손을 자칭하며 ‘금호’라는 두 글자로 향청의 옛집과 고을 부근에 편액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사를 지내며 향교의 제기를 몰래 빌리니, 이러한 행위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없고 예의도 없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은 허조에게 후손으로서 어그러진 행동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문묘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한 서원의 이름으로 첩설을 하는 예절은 있을 수 없으며, 우리나라 선비 모두가 나서서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사태의 잘못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설립된 금호서원에서 도회가 열리고, 급히 통문을 돌려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 사태에 대한 사림의 공론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이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하양읍에는 부호리금락리에 각각 금호서원이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경산의 역사문화 지도, 다시 쓰는 경산 이야기』, 경산문화원, 경산문화원,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23년 5월 10일, 琴湖書堂釜谷으로 옮겨 건축한 후 敬庵 許稠의 位版 奉安禮와 揭額禮를 거행하니 기한에 맞춰 玉洞書院에서도 참석해주길 요청하는 通文
1923년 5월 10일, 琴湖書堂釜谷으로 옮겨 건축한 후 敬庵 許稠의 位版 奉安禮와 揭額禮를 거행하니 기한에 맞춰 玉洞書院에서도 참석해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文敬公 許稠陽村 權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세인 1383년(우왕 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년 뒤인 1385년(우왕 11)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고려에서는 中郎將와 典儀寺丞를 지내다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입사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태조 때에는 주로 文翰職을 역임하여 그에게는 학문적 기량을 축적하던 시기가 되었다. 태종 때에는 세자를 수행한 賀正使 일행으로 明나라에 다녀와 禮曹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예조의 실무자로서 각종 국가의례를 제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계기가 되어 세종의 즉위와 함께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421년(세종 3) 질병으로 예조에서 물러나 參贊議政府事가 되었으나, 이후에도 예조의 일에 적극 관여하였다. 그는 儀禮詳定所 提調로서 국가의례의 여러 사안들을 검토하거나 결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六典을 수찬할 때에는 제조로 임명되는 등 국가의 주요한 의례, 법제의 제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425년(세종 7) 예조판서가 入朝한 사이에 명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자 그에게 임시로 예조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것은 예조의 업무에 대한 그의 전문성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허조는 이조판서, 중추원판부사, 의정부찬성, 판중추원사 등을 거처 우의정과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그의 일생을 요약하면 禮制를 제정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적을 보인 허조에 대해 지방 유림에서는 1684년(숙종 10)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하양 금락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러다 1724년(경종 4) 하양 서사리로 이건하였고, 1790년(정조14)에 ‘琴湖’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금호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벗어나지 못하고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에는 그 곳에 遺墟碑를 세우고 壇享으로 배향해왔다. 이 통문을 보면 훼철된 상태로 이어져 오다가 1923년 봄에 금호서원을 영건하기로 의논하고서, 舊址가 궁벽하여 영건하기 마땅치 않으므로 釜谷으로 옮겨 짓기로 하였다. 이건하는 서원의 5리 떨어진 許谷은 자손들의 世居地이며, 허조의 아들 貞簡公 許珝와 손자인 凝川 許造를 기리기 위해 세운 旌忠閣의 부근이라고 하였다. 금호서당 명의로 발급된 이 통문에서 都有司 進士 鄭弘黙 등은 5월 20일에 위패를 봉안하고, 다시금 서원의 현판을 달 계획이니 날에 맞춰 도내 유림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길 요청하였다. 서당이란 명칭으로 통문을 발송한 것은 아직 위패를 봉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통문이 발송되기 이전에 하양에서는 두 곳의 금호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동일한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한 고을에 같은 이름으로 두 곳에 건립되는 문제로 하양의 유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23년 2월 26일 금호서당 道會中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을 보면 허조의 후손이 훼철된 금호서원를 복원했는데 또 다른 許氏가 금호서원이란 扁額을 내건데 대해 성토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보다 자세히 보면 瓦村에 사는 허씨가 또한 후손을 자칭하며 ‘琴湖’라는 두 글자로 鄕廳의 옛집과 鄕隣에 편액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사를 지내며 鄕校의 祭器를 몰래 빌리니, 이러한 행위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없고 禮儀도 없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은 허조에게 후손으로서 어그러진 행동일 뿐만 아니라, 또한 文廟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한 서원의 이름으로 疊設을 하는 예절은 있을 수 없으며, 우리나라 선비 모두가 나서서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사태의 잘못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설립된 금호서원에서 도회가 열리고, 급히 통문을 돌려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 사태에 대한 사림의 공론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이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하양읍에는 부호리금락리에 각각 금호서원이 있다.
자료적 가치
하양에 건립된 두 개의 금호서원 중 부호리에 건립된 서원의 내역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하양 유림들은 금호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옛 이름으로 서원을 중건한 것을 도내에 알려 사림의 공의에 의해 정당히 서원 건립이 이루어졌음을 알리고자 이 통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경산의 역사문화 지도, 다시 쓰는 경산 이야기』, 경산문화원, 경산문화원,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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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通諭事伏以河陽琴湖書院文敬公敬庵許
先生妥靈之所也一自戊辰毁撤之後便作葵麥之場
士林之依歸無所昆孫之齎鬱已久幸於今春合謀
營建而以其舊址稍僻移築於釜谷五里之許谷
子孫世居之地也且 先生子若孫貞簡凝川兩世槕楔
之傍也將以今月二十日爲揭虔奉安之計伏願 僉
尊越期 賁臨俾爲合席觀禮之地千萬幸甚
右文通
癸亥五月十日
琴湖書堂都有司進士鄭弘黙
齋有司幼學李悳求
鄭康和
鄕有司金致元
都桂周
會員金夏洛
都秉洪
金兌洪
宋秉學
李致奎
許漢
許佑
座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