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하양 금호서당(琴湖書堂) 통문(通文)
1923년 5월 10일, 금호서당을 부곡으로 옮겨 건축한 후 경암 허조의 현판 게액과 위판 봉안례를 거행하니 기한에 맞춰 옥동서원에서도 참석해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이 통문을 보면 훼철된 상태로 이어져 오다가 1923년 봄에 금호서원을 영건하기로 의논하고서, 옛 서원터가 궁벽하여 영건하기 마땅치 않으므로 부곡으로 옮겨 짓기로 하였다. 이건하는 서원의 5리 떨어진 허곡은 자손들의 세거지이며, 허조의 아들 정간공 허후와 손자인 응천 허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충각의 부근이라고 하였다. 금호서당 명의로 발급된 이 통문에서 도유사 진사 정홍묵 등은 5월 20일에 위패를 봉안하고, 다시금 서원의 현판을 달 계획이니 날에 맞춰 도내 유림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길 요청하였다. 서당이란 명칭으로 통문을 발송한 것은 아직 위패를 봉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통문이 발송되기 이전에 하양에서는 두 곳의 금호서원이 건립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동일한 인물을 제향하는 서원이 한 고을에 같은 이름으로 두 곳에 건립되는 문제로 하양의 유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23년 2월 26일 금호서당 도회에서 옥산서원로 보낸 통문을 보면 허조의 후손이 훼철된 금호서원를 복원했는데 또 다른 허씨가 금호서원이란 편액을 내건데 대해 성토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보다 자세히 보면 와촌에 사는 허씨가 또한 후손을 자칭하며 ‘금호’라는 두 글자로 향청의 옛집과 고을 부근에 편액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사를 지내며 향교의 제기를 몰래 빌리니, 이러한 행위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없고 예의도 없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은 허조에게 후손으로서 어그러진 행동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문묘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한 서원의 이름으로 첩설을 하는 예절은 있을 수 없으며, 우리나라 선비 모두가 나서서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사태의 잘못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설립된 금호서원에서 도회가 열리고, 급히 통문을 돌려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 사태에 대한 사림의 공론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이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 하양읍에는 부호리와 금락리에 각각 금호서원이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경산의 역사문화 지도, 다시 쓰는 경산 이야기』, 경산문화원, 경산문화원, 200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