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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칠곡(漆谷) 귀봉서당(龜峯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F.1922.4719-20150630.Y1511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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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귀봉서당,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임오동
작성시기 1922
형태사항 크기: 44 X 87.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1922년 칠곡(漆谷) 귀봉서당(龜峯書堂) 통문(通文)
1922칠곡 귀봉서당에서 󰡔여헌선생문집󰡕을 임의로 수정한 견산 장명상(1865~1937) 등을 규탄하고, 새로이 보완된 판목을 간행하는 것에 대하여 옥동서원에서 도움을 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통문은 반수 신익균 외 32명이 연명하였는데, 인동장씨 24명, 평산신씨 5명, 동래정씨 2명, 야성송씨 1명, 한양조씨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던 당시에 문집 중간에 참여했던 자들로 짐작된다.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발생하였다. 하나는 장명상이 멋대로 문집의 내용을 고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명상의 사촌 동생들이 마음대로 중간을 위해 제작한 판목을 훼손한 것이었다. 칠곡의 유림들은 이들을 규탄하고 중벌을 결정하였는데, 이들은 잘못을 했음에도 오히려 멋대로 소리치고 힘으로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는 지경에 이렀다. 장명상이 마음대로 고쳐서 문제가 된 내용을 보면 첫째, 원본에 수록된 「무제」 시를 옮기면서 그 내용을 임의로 고쳤다. 둘째, 「무제금」이란 시에 임의로 여러 선현들의 글을 잘라 붙였다. 셋째, 여헌이 지은 「경현록발」을 장명상이 「정문헌공실기발」로 고쳤다. 이외에도 장명상이 잘라서 고친 것이 수십 개의 조목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칠곡 유생들이 이를 수정하여 간행하려고 하는 때에 장명상의 사촌 동생들이 난입하여 판목을 훼손하고, 유생들을 억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칠곡 유생들도 문제가 된 이 세 가지 조목을 그들이 무리하게 첨부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나아가 부득이 다른 지역 사림들에게도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정을 알리고, 전체 사림이 이들을 규탄하여 문집의 간행이 바로잡힐 수 있도록 도와주길 요청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22漆谷 龜峰書堂에서 󰡔旅軒先生文集󰡕을 임의로 수정한 見山 張命相 등을 聲討하고, 새로이 補板을 내는 것에 玉洞書院에서 도움을 주길 요청하는 通文
1922漆谷 龜峰書堂에서 󰡔旅軒先生文集󰡕을 임의로 수정한 見山 張命相(1865~1937) 등을 聲討하고, 새로이 補板을 내는 것에 玉洞書院에서 도움을 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통문은 班首 申翊均외 32명이 聯名하였는데, 仁同張氏 24명, 平山申氏 5명, 東萊鄭氏 2명, 冶城宋氏 1명, 漢陽趙氏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칠곡 지역에 세거하는 성씨들로서 서로 世誼를 다져왔으며, 문제가 발생하던 당시에 文集重刊에 참여했던 자들로 짐작된다.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발생하였다. 하나는 장명상이 멋대로 문집의 내용을 고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명상의 從弟들이 武斷으로 중간을 위해 제작한 판목을 훼손한 것이었다. 칠곡의 유림들은 이들을 聲討하고 重罰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잘못을 했음에도 오히려 멋대로 소리치고 힘으로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는 지경에 이렀다. 그러자 부득이 전체 사림들에게 일의 顚末을 알리고 전체 사림이 이들을 성토하여 문집의 간행이 바로잡힐 수 있도록 도와주길 요청하였다. 통문을 보면 旅軒 張顯光의 󰡔文集󰡕이 간행된 지 오래되어 판목이 닳아 흩어지고 글자가 조밀하여 1920년에 本孫과 鄕儒가 東洛書院에 모여 重刊을 결정하였다. 이때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 뜻을 公議로 정하였다. 이것은 이미 당시의 及門諸賢이 校正한 것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설혹 그 사이에 한 둘의 의심스러운 사안이 있더라도 망령되이 일의 是非曲直을 헤아려 그 可否를 의논하는 것은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라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판본을 베끼는 날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本孫 張命相이 감히 스스로 영리하다고 여겨 이를 보고 손가는 대로 베끼고, 점을 찍고, 더하고, 삭제해서 글을 지었는데, 나아가 글을 과장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칠곡 유생들은 程頤朱子도 선배의 글을 함부로 고치지 않고, 힘써 변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선배의 문자로서 신뢰하는 것은 그대로 전하고, 의심하는 것도 그대로 전해야 옳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명상은 몇 글자만 고친 것이 아니라 수십 조목의 글을 고치고, 그 뜻을 왜곡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입장을 바꿔 장명상의 후손이 후대에 先集을 멋대로 고치면 변명도 필요없이 悖孫亂賊이라 불릴 것이라며, 현재 장명상의 입장이 그러하다고 했다. 이에 門中과 鄕中에서 重罰을 이미 내렸다고 한다. 또한 간행하는 일을 마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1921년(辛酉) 가을에 舊本에 의거하여 東洛書堂刊所를 설치하고, 지금 功役을 마치고 마땅히 인출하기만을 헤아리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장명상의 從弟 張泌相, 張轍相이 또 相命의 惡習을 이어서 이내 刊所를 엿보다가 사람이 없을 때 文集 6판을 釘으로 뚫고, 칼로 도려내었다고 하였다. 유생들은 이런 일은 실로 옛날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는 변고라고 하였다. 이후 서늘하고 떨리는 심정을 겨우 그치고 모두가 모여 이들을 성토하고 補削하는 것을 완료하였다. 그런데 저들이 도리어 멋대로 소리 지르고 門中과 鄕中을 힘으로 누르고 업신여기고 짓밟음으로써 수백 년 된 서당을 無人之境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칠곡 사림들은 자신들의 誠意가 부족하여 이러한 일에 이르렀다고 한탄하며 전체 사림들이 聲討하는 글을 발현하여 補板의 일을 도모하고, 先師의 문집이 그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이 일의 顚末을 간략히 추려서 聯名하여 아뢴다고 하였다. 통문의 말단에는 문집 내에서 무단으로 수정하여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添錄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제가 된 내용을 보면 첫째, 原本에 수록된 詩를 옮기면서 그 내용을 임의로 고쳤다. 장명상敬庵 盧景任(1569~1620)의 문집에 실린 「次盧甥草堂韻」를 고치면서 「無題」라는 했는데, 원래 이 시는 󰡔敬庵集󰡕 중 「崇巖草堂詩」에 있는 것으로 그 韻이 旅軒의 「無題」 詩와 동일하여, 좌측에 ‘次韻’ 두자를 기록해 놓았다. 또한 「無題唫」은 呂鑑湖伊川庄 序文에서 미완성의 시라서 ‘無題唫’이라 하였는데, 이를 장상명1901년 봄에 徐思遠, 呂大老 등이 朱子의 시를 分韻하던 것을 본떠서, 여러 賢人의 遺集에서 韻을 추가하여 지었다. 이처럼 시를 멋대로 고친 것뿐만 아니라 旅軒이 지은 「景賢錄跋」을 장명상이 「鄭文獻公實記跋」로 고쳤다. 이것은 旅軒文康公 寒暄堂 金宏弼의 碑文과 寒岡 鄭球의 行狀에서 考究하여 지은 것으로, 󰡔�景賢錄󰡕이 한훤당 김굉필一蠹 鄭汝昌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나, 旅軒이 발문을 지었을 때는 󰡔경현록󰡕을 칭하는 것이었다. 그 후 󰡔一蠧集󰡕�을 간행할 때 󰡔文獻公實記󰡕를 편입하면서, 이 발문을 실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근거로 장명상여헌이 직접 쓴 제목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장명상이 刪改한 것이 수십 개의 조목에 해당되는데, 간행하는 때에 이들 세 가지에 이르러 굴복하지 않고, 그 從弟 필상 등의 무리가 그 뜻을 편들어 간행하려는 판목을 칼로 도려내어 차지하였다고 했다. 이들 유생들 역시 이들이 마찰을 무릅쓰고, 문제가 된 세 가지 조목을 첨부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문집 간행을 두고 발생하였던 是非의 한 사례로서, 󰡔旅軒先生文集󰡕 重刊 당시의 구체적인 분쟁 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여헌집󰡕의 重刊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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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 先師旅軒先生文集刊行於世己三百年之久而板本刓漫字行稠密故庚申
本孫與鄕儒齊會東洛亟謀重刊依舊本無一字加減之意公議已成者誠以此本己經當時
及門諸賢之校正則設或於其間有一二疑案在後生審愼之地不可妄加擬議以招故犯之譏也
及其寫本之日本孫張命相乃敢自多己見信手下筆圖之點之增之削之又從以潤色更無顧
忌斯文之變孰大於是噫昔程傳之以姪爲猶子以沿爲泝不過數字轉改而紫陽夫子猶且
累書而力辨之何也豈以前輩文字信以傳信疑以傳疑之可乎今張命相以三百年後後生
肆然擅改於三百年前刊行之先集無所不至其爲悖孫亂賊不在多辨矣自門鄕已試重罰而刊事不可不
竣故至辛酉秋依舊本設刊於洛堂今已訖功謀欲印須矣不意張命相從弟張泌相張轍相又踵
命相之惡習乃瞰刊所之無人就文集六板釘以鑿之刀以削之此實古無今無之變也是亦
有人心者乎鄙等不覺心寒膽落不知所以處之止欲齊會聲討補削以完則彼反胡叫挽腕凌
踏門鄕使數百年體貌之所便作無人之境噫噫痛矣此莫尤鄙等之誠意不能動得人而事已到
此亦未給凡全省士林之事也玆略掇事變之顚末聯名仰告伏望 僉君子峻發聲討之文
亟圖補板之擧使 先師文集賴以不墜於一二兒憾之手則爲冠儒服儒者千萬幸甚
右文通
玉洞書院 僉座 前
壬戌三月二十一日龜峯書堂會中
班首申翊均
張頣遠
張禹九
有司張翊相
張志衡
公事員趙鉉琪
張馨植
曹司申相必
張黙相
製通張永文
鄭根元
寫通張久喜
申鉉九
會員張錫智
張瑛遠
張永冑
張箕相
張南煥
張禧遠
申相兌
鄭箕燮
申相弼
張範相
張志周
張周植
張泓相
張徽相
宋鎭弟
張輔桐
張炳弼
張淇相
張炳軾
張在奎
事實略
文集第一卷
無題
直作男兒宇宙遊 雖今在野心常靜 南北東西皆可宅 獨行不須離群立
玆遊全古非友躬修 何獨居山境始幽 農商工士幷相儔 肯向西風蹙蹙愁
命相改以次盧甥草堂韻 盧甥卽先生甥侄敬庵也敬庵集刊行不過百餘年而其集中
有崇巖草堂詩而其韻與文康公無題同而左有次韻二字錄 先生無題詩驟看則若舅次甥
韻徐察則安知非先生寓意泛作而不屑屑於題目乎不然一篇中何全無唱和之旨又無勉勵之意
也且欲以百餘年刊行之集援据於三百年以前文字削之改之豈不未安乎
無題唫 命相改以辛丑春與徐行甫思遠呂聖遇大老諸人泛舟仙査朱晦庵詩出載長烟重歸裝片月輕
千岩猿寫友愁絶掉歌聲分韻得長字
按諸賢遺集則似是仙査分韻而追作前日之韻也先生首句有追思昨日遊事過意何長呂鑑湖
川庄序曰某兄無意琢句淂長字而未成云可想非當日所作而書以無題唫三字也今做出許多題目
宛然若出於先生手筆者是豈後生尊衛之道乎
文集第五卷
景賢錄跋 命相改以鄭文獻公實記跋
先師文康公寒暄先生碑文有曰寒岡鄭公當爲先生集景賢續錄不幸灾於火莫傳寒岡先生行狀有曰當
寒暄先生景賢錄頗有所追拾增述以爲續錄云則景賢錄本老先生所作而其後有岡翁續錄故 文康公
此云云也蓋景賢錄卽爲寒暄一蠹而記實者也文康公作跋文時只稱景賢錄而其後一蠧集刊行時編入文獻
公實記而載此跋文者也安可以此而遽易先生手筆之題目乎其矜愎自勝推此可知矣
其他張命相所刪改者數十條不敢下手於登刊之日至於右記三條則絡是不服又其從弟泌相輩右袒其意刀削
己刊之板以黨惡遂非爲能事而不知冒觸添先之科豈不痛歎也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