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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F.1898.4723-20150630.Y1510417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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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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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병산서원, 영천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작성시기 1898
형태사항 크기: 96 X 270
수량: 7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898년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1898년 3월 30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병산서원(屛山書院)에서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영천향교(永川鄕校)로 보낸 통문(通文)이다. 통문에는 경상북도 상주군(尙州郡) 우산(愚山)에 거주하는 정경세(鄭經世)의 후손들이 정경세 연보(年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이와는 별도로 상주군도남단소(道南壇所)에서 정경세의 연보를 간행하려 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요구해 놓았다. 통문은 병산서원 도유사(都有司) 이기로(李基魯) 외 61명이 연명으로 작성하였으며, 통문 다음에는 연보 간행을 준비하는 임원의 명부인 「우복정선생연보중간시파록(愚伏鄭先生年譜重刊時爬錄)」과 변파문(卞破文) 8개조가 수록되어 있다. 변파문은 우산의 정경세 후손이 주장하는 연보 간행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병산서원 통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항은 문자(文字) 시비다. 정경세병산서원에 배향된 류성룡(柳成龍)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정경세 후손들이 간행하려 하고 있는 정경세의 연보에는 류성룡에 대해 ‘선생(先生)’이라는 명기가 빠진 채, 다만 시호(諡號)와 별호(別號)만으로만 호칭해 놓았다. 더구나 연보에는 정경세를 ‘선생’이라 칭해 놓았기에, 사문 관계를 명확히 하는데 어긋난다며, 류성룡의 후손들이 반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자시비는 조선후기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향전(鄕戰) 중 하나인 가문 간 우열 경쟁에서 비롯되었다. 부계 중심의 현조(顯祖)를 추숭(追崇)함으로써, 사족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양태가 문자시비와 같은 향전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愚伏先生集』, 鄭經世,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98慶尙北道 尙州郡 愚山鄭經世 後孫들이 同春本을 근거로 『愚伏先生年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려 하자, 경상북도 安東郡屛山書院 측에서 부당함을 주장함과 동시에 별도로 『愚伏先生年譜』 重刊을 진행하기 위해 永川鄕校에 보낸 通文
자료의 내용
1898년 3월 30일, 慶尙北道 安東郡屛山書院에서 경상북도 永川郡永川鄕校에 보낸 通文이다. 통문은 1898년 전후, 『愚伏先生年譜』 간행을 둘러싸고, 鄭經世(1563~1633) 後孫과 柳成龍(1542~1607) 후손들 중심으로 진행된 文字 是非와 관련되어 있다. 해당 문자시비의 개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정경세의 黨色은 南人이지만, 그의 둘째 사위는 西人 山林 宋浚吉(1606~1672)이었다. 정경세 사후, 그의 年譜는 송준길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송준길이 작성한 연보에는 정경세의 학맥과 교유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남인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송준길의 당색이 남인에게 민감한 서인인 것이 중요한 이유중 하나였다. 정경세의 후손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정경세의 문집에 송준길이 작성한 연보를 쉽게 수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송준길을 배향한 黔潭書院에서, 송준길의 문집인 『同春堂集』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송준길이 작성한 『우복선생연보』가 수록되었다. 이것이 본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黔潭本 또는 同春本이다. 그러다 1821정경세의 후손들이 『우복선생연보』 간행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저본은 동춘본이었다. 동춘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정경세의 스승인 류성룡을 표현하는데 있어, ‘先生’이라 칭하지 않고, 단지 諡號와 別號만으로 류성룡을 호칭했기 때문이다. 남인들 중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문구상의 失禮가 아니라, 서인인 송준길류성룡을 폄하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자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남인은 단연 류성룡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의 반발로 1821년의 『우복선생연보』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류성룡의 후손들은 향후 이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庚寅年인 1830정경세의 후손들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과 합의하여, 류성룡을 ‘先生’이라 칭한 『우복선생연보』를 간행하였다. 이것을 상주 靑龍寺에서 간행했다고 하여, 靑龍本 또는 庚寅本이라고 부른다. 이 모임에는 1821년 『우복선생연보』 간행을 주도했던 鄭象晉(1770~1847)과 鄭象履(1774~1748)도 참석하였다. 한 동안 잠잠하던 연보 간행 문제는 1896경상북도 尙州郡 愚山에 거주하던 정경세 후손들이 정경세의 문집 別集 重刊을 시도하면서 재연된다. 이때 연보가 포함되었는데, 그 저본이 청룡본이 아니라 문제가 되었던 동춘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류성룡 후손들이 다시 반발하게 되고, 양 가문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통문을 각각 영남 列邑에 발급하며, 시비를 일으키게 된다. 수년간의 시비는 1899우산 측에서 연보 간행을 강행함으로써 끝이 난다. 본 통문은 시비가 진행 중인 1898년 3월, 류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에서 영천향교에 발급한 것으로, 우산 측의 『우복선생연보』 간행이 부당하다는 주장과 이와는 별도로 상주군道南壇所에서 『우복선생연보』 간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본 통문은 병산서원 都有司 前監役 李基魯 외 61명이 연명하여 영천향교로 발급한 것이다. 통문 다음에는 「愚伏鄭先生年譜重刊時爬錄」과 먼저 우산에서 발급한 통문을 卞破하는 8개 조항이 첨부되어 있다. 먼저 통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정경세의 연보 草本은 송준길이 撰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류성룡 문하의 傳受 관계 부분에서는 허술한 곳이 많다. 그래서 수백년 동안 간행되지 않았으니, 이는 선배들이 어렵고 신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경인년(1830) 고을과 도내의 여러 인사, 그리고 정경세의 本孫인 정상진정상리 등이 모여 논의한 끝에, 新編 몇 질을 印頒하였다. 그런데 지금 60여 년이 지나, 정경세 집안에서 1830년의 판본을 무시하고, 송준길이 작성한 草稿를 인용해 연보를 간행하려 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동지들이 병산서원에 모여 이 문제 처리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道南壇所에다가 刊所를 정하고, 별도로 刊任을 薦出하여, 『우복선생연보』 간행을 준비하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상주군 우산정경세 후손들이 동춘본을 저본으로 연보를 간행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는 통문을 병산서원 측에서 보낸 것이다. 거기다가 우산에서 간행하는 연보에 맞대응하기 위해, 류성룡 후손들의 입장이 반영된 연보를 별도로 간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에 「愚伏鄭先生年譜重刊時爬錄」을 첨부하였는데, 이는 류성룡 후손 주도로 간행되는 연보의 刊任 명부다. 총 책임자인 都都廳은 前 承旨 李晩由(1822~1904)가 맡았으며, 그 외에 都廳·校正都監·看役都監·掌財都監·收錢有司·運板有司·監印都監·監印有司를 두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수전유사의 경우 총 31명을 임명하였으며, 도내 28개 고을에 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각 고을로부터 중간 비용을 지원받아, 자신들이 간행하는 연보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때 영천군에서는 進士 鄭東潤, 幼學 曹熙宇·徐廷玉 3인이 수전유사에 임명된 것으로 확인된다.
가장 말미에는 8개조의 조항이 첨부되어 있다. 8개 조항은 우산정경세 후손이 주장하는 『우복선생연보』 간행의 당위성은 卞破하는 내용이다. 본 통문 이전에 우산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는 통문을 영천향교를 비롯해 도내 各所에 발급하였기에, 이를 卞破하는 조항을 별도로 첨부했던 것이다. 해당 조항에서 확인되는 우산의 주장, 그리고 이를 卞破하는 병산서원 측의 주장은 본 문자시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팽팽히 대립하며, 시종일관 주장하던 바로,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조항에서 확인되는 우산 통문의 주장은 동춘본의 중대함이다. 송준길이 찬한 연보의 草本을 일찍이 兩朝가 열람하였기에, 함부로 바꿀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이번에 간행하는 별집의 연보도 동춘본을 저본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兩朝는 肅宗正祖로, 두 국왕은 『동춘당집』을 친히 열람하고 간행을 지시하였었다. 이에 대해 병산서원 측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번에 간행할 때, 5字를 보충하고, 또 14字를 추가로 보충하는 것은 그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우산 측에서 동춘본에다가 몇 자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조항에서는 동춘본이 정확하다는 우산의 주장을 반박해 놓았다. 문자시비가 진행되는 동안 우산 측은 송준길정경세의 연보와 사적을 매우 꼼꼼하게 정리했음을 찬양하였었다. 그리고 영천향교로 보낸 통문에 송준길이 사적을 정리하며 보낸 각종 書札의 내용까지 첨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병산서원 측은 송준길이 작성한 사적이 소루함을 지적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류성룡의 沒年月이 1607년 5월임에도 금담본, 즉 동춘본은 8월로 명기되어 있으니, 송준길이 찬한 연보가 꼼꼼하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조항에서는 정경세의 德業과 文章을 평가한 대목에 있어서 동춘본과 청룡본에 차이가 없다는 우산 측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 조항은 본 문자시비의 핵심 사안인 류성룡에 대한 ‘先生’의 칭호의 사용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동춘본은 류성룡에게 ‘선생’이라 칭하지 않은 반면, 청룡본은 ‘선생’이라 써야 할 곳은 반드시 ‘선생’이라 썼기에, 師門을 드러내는데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조항에서는 청룡본이야 말로 公議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우산 측에서 청룡본을 감안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30년 만들어진 청룡본은 영남의 여러 선배들이 청룡사에 모여 의논을 한 끝에 간행되었으며, 심지어 이 자리에는 정상리정상진도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룡본은 物力 부족으로 약간만 인쇄·반포되었었다. 그래서 병산서원 측은 현재 청룡본이 남아 있는 곳을 살펴보니, 河上에 3本, 우산에 2본, 愚川에 1本, 漆溪에 1본, 梅院에 1본이 있는 것으로 확인하였다. 우산정경세 후손들도 분명 청룡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산 측에서는 청룡본이 藏閉되어 배포되지 않아 알 수 없다고 하니, 이는 기만하는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다섯 번째 조항에서는 우산 측의 통문에 ‘河上가 이를 받았으나, 하상의 사람들이 곧 돌려보냈다"라고 적혀 있는 부분을 반박해 놓았다. 우산의 연보를 주고받은 것에 대해, 우산 측의 표현이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여섯 번째 조항에서는 우산 측이 河上, 즉 河回류성룡 本孫에 대해, 冷視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 여러 차례 왕복을 게을리 하고 있으며, 이제 연보까지 간행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청룡본은 도내의 여러 長德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우산 집안의 어른들도 참여했는데, 그 뜻을 저버리고 있으니 도의상의 문제가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일곱 번째 조항에서는 류성룡 후손들이 『西厓先生年譜』에 의거해 11字를 추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안동군의 수령이 예전에 하상에 先通했던 것이며,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으니, 잘 감안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해당 11자는 일종의 중재안이다. 『서애선생연보』에 류성룡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을 "謁退溪李先生受近思錄等書"라고 표기했었는데, 이를 모방하여 "謁西厓柳先生受爲學之序"라 표기하는 것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마지막 여덟 번째 조항에서는 우산 측이 청룡본 2本을 가지고 있음에도, 받지 않았고 모른다고 말하고 있음을 강렬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鄕戰의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후기 향전의 양상은 실로 다양하였다. 黨色 간, 嫡庶 간, 가문 간의 향전으로 대별되지만,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후기로 갈수록 광범위해지는 것은 가문 간의 향전이다. 가문 간 향전은 성리학적 종법질서의 정착에 따라, 父系 중심의 門中 조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가문 간의 優劣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특히 16~17세기 활동했던 顯祖들의 師門 관계와 序次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같은 스승에게 수학했던 제자들끼리의 서차 문제, 師門 관계 여부, 師門 간 文字 표기상의 문제 등이 그 예이다. 본 통문에서 확인되는 문자시비는 사문 간 문자 표기상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의 정경세 후손들이 연보를 간행함에 현조인 정경세에게는 ‘선생’이라는 용어를 쓰되, 현조의 스승인 류성룡은 시호와 별호만으로 호칭했기에, 현조의 스승인 류성룡의 후손과 문자시비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향전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광범위해지고, 시대가 급변하는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향전의 등장은 조선후기 중앙 정권의 閥閱化로 가문이 현달할 수 있는 길이 좁아지던 정치적 상황과 전통적인 재지사족의 권위가 약화되고 新鄕의 도전을 받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던 사족들의 보수적인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顯祖의 권위를 재활용하여 사족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자세가 다른 가문과의 우열 경쟁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문자시비와 같은 향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향전은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정세 속에 지리멸렬했던 재지사족들의 대응 양상을 보여준다.
『愚伏先生集』, 鄭經世,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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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告事伏以愚伏鄭先生年譜草本蓋出於宋同春所撰而凡係厓門傳受稱謂等處率多未安疏漏之端數百年藏棄巾衍不爲之刊布者槪出於先輩難愼▣▣意而年譜之不載於別集實有欠於尊
慕先生之道故奧在庚寅鄕道內諸長德屢次往復於愚山本孫石坡制庵二公撰次新編彙成一書印頒幾帙事證俱存而今於六十餘年之後愚鄭氏有甚見得削刊已行之板本反?捨置之草藁執拍▣痼牢不可破有非隻手之
所可支訪者故生等爲是之?以重刊庚寅本之意通告同志爲今日本院之會而齊會之席僉議歸一玆定刊所于道南壇下薦出刊任諸員以爲剋期敦事之地伏願僉尊同心協力少竣工役之就?奉玩新編之完議還送已布之春本各尊
所尊傳斯文有賴而卞破諸條?列如左垂諒千萬幸甚
右文通
永川鄕校
戊戌三月三十日屛山書院道會中都有司前監役李基魯
齊有司柳暾榮
權永祚
公事員幼學李建鎬
張永奭
朴弼鎬
都元相
曹司幼學洪友欽
宋鴻陸
朴世熙
李敎和
李炳彩
製通幼學李相河
呂心淵
李泰一
孫永應
?通幼學洪鍾韶
李燾容
朴敬植
尹源敎
金永胤
金炳憲
李台鉉
洪鍾憲
金?
李守弘
權準悳
會員幼學金鍾晩
柳蘭榮
李時馨
柳畯睦
蔡周一
柳孝榮
鄭源奎
李起孝
柳道絢
蔡謙禹
柳千植
琴田淵
洪鍾運
曺英煥
李鍾海
李能格
丁大鉉
權相勳
權鼎相
權炳皓
李休承
柳源佑
柳昌植
金炳養
呂錫光
趙宗衍
進士鄭東潤
呂承東
幼學趙晉衍
金在源
金相說
申永鎬
權準鶴
金秉殷
金秉韶

愚伏鄭先生年譜重刊時爬錄
都都廳
承旨李晩由
都廳
幼學李衡敎
李漢久
校正都監
正言朴遇賢
都事柳道獻
校正有司
幼學李炳葉
進士金輝澤
幼學張志求
看役都監
都事盧輿敬
幼學李相淳
看役有司
幼學柳璜榮
注書金輝炳
掌財都廳

進士柳道弼
幼學金永培
收錢有司
進士李光龍安東
幼學柳昌植尙州
李中華禮安
進士金世東善山
幼學李奎榮漆谷
張永殷仁同
申洪均
朴海薰大邱
鄭在卨星州
進士呂承東金山
幼學李明均知禮
李益和聞慶
蔡圭五咸昌
李東泳龍宮
李東植醴泉
李章?軍威
趙鎭容英陽
李壽升寧海

洪奎欽義興
進士金秉禧榮川
幼學趙性洛靑松
▣永申永浩義城
金炳養比安
進士鄭東潤永川
幼學曹熙宇
徐廷玉
幼學曹漢承新寧
李熙久慶州
黃大鎭豊基
進士金大鉉高靈
金泰植玄風
運板有司
幼學柳千植
李炳東
監印都監
幼學柳畯睦
金世麟

監印有司
永川幼學權洪鎰
仁同李鍾海
愚山通諭以宋同春所撰草本曾經兩朝乙
覽擧重言之果是敬愼之地也似不可一字加減
而今補以五字何也追補十四字何也自補之時則
少無敬愼之心於角勝之時則擧以爲箝制之資
有非愚見之所可知也
愚山通諭末端附一幅紙列書同春往復許多
書札謂之煞用精力大較同春愚爺立朝事
迹詳考到底而於愚爺贊揚吾黨諸先輩文
字則恐未免疏漏刪沒觀於追補諸?可知矣
西厓先生易?在丁未五月而黔潭本刊行譜
書以八月若非草本則豈能如是之?繆乎是
未可全信也
同春靑龍本兩本以愚爺德業文章言之則

無大異處何以言之同春本末附追補諸?之謂也以
愚爺師門稱謂言之則有懸絶處何以言之靑龍
本言西厓先生處必書先生字之謂也今愚山之底
死牢執似不在於無大異處在於懸絶處若以
愚爺所稱有罔極之恩體念先故則恐不當若是
恝然
靑龍本之說非生等今日?出也?在庚寅江左
右諸先輩齊會此寺爛議撰次而愚山石坡
兩公實主刊事坐於物力▣敷只印頒若干本
焉今番道會時詳聞靑龍印本見存處則河上
有三本愚山有二本愚川有一本漆溪有一本梅院
有一本刊亦愚山布亦愚山愚山今日一辭牢律卽
云藏閉不布不知實事者猶可欺也眞知實事者
不可欺也其於一道公議何哉
愚山通諭云河上受之而河上之人旋卽還送此與
不受何異向只言受之不言還送無乃太巧於瞞人

愚山冷視河上本孫向屢度往復漫謹歲餘竟
同春本到今爲嶠南人士者自有辨別淑慮之良
河上之苟且求好不無其責向愚山冒沒刊行實

難挽回則其在吾黨惟有刊行靑龍本一事此
非敢角勝於愚山實不敢肯棄道內先父老已定之
論而亦不忍孤負愚山前日僉長德刊布之遺意也
惟僉尊諒察尊
一十一字追補乃花山太守先通于河上北而今日通諭
亦言倣西厓先生年譜例有所云云旣當已經
乙覽擧重言之又當苟且塡補彌縫說去何其
自相矛盾之若是甚也
靑龍本刊後亦當印布然其於二本之受與不受
可知各尊所尊之?向矣愚山之今以春本反爲恐
喝脅生之?柄是未可知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