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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 권중후(權仲垕)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B.1674.4713-20150630.Y155012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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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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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권중후, 권상구, 경주부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74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73년 이행도(李行道) 등 상서(上書)
옥산서원의 위상을 내세워 정혜사 승려들에 대한 관의 침탈을 막으려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보면 옥산서원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하였는데, 서원에서 1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혜사라는 오래된 사찰이 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회재가 일찍이 왕래하며 책을 읽던 곳으로서 건물의 창과 벽 사이에 그의 친필 시문이 남아 있기에 영원히 서원에 소속시켜 선생문집과 여러 책의 목판을 모두 여기에 소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부터 경주부순영에서 마음을 다해 돌아보고 보호하는 것이 국가 중대한 부역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면제시켜 승려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목판을 수호하게 하였으니, 이 사찰을 보호함이 이때부터가 아니겠냐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관례에 따라 다른 사찰을 보호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선자지[부채에 바르는 질기고 튼튼한 종이] 6묶음을 구하여 주기를 관가로부터 발급된 패를 내놓으며 바치도록 독촉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찰은 평소 쇠잔한 약간의 승려들이 얇은 종이를 겨우 떠서 생계를 도모하는 재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부채에 맞는 두터운 것은 본래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흉년을 겪으면서 사찰의 승려들이 대부분 죽었기에 종이를 만들 인력도 부족하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관가에서 선자지를 계속 요구하여서, 만약 다른 곳에서 사들여 상납하게 된다면 굶주림은 바야흐로 극에 달할 것이며, 종이를 사는 값을 마련할 길도 없다고 했다. 또한, 만약 힘을 다해 스스로 처리하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종이의 품질은 일찍이 만든 적이 없기에, 겨우 남아 있는 5~6명의 무리로는 물건을 납품할 힘이 전혀 없어 바리때기를 매고 서서 하루 아침저녁을 있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선자지를 만드는 일로 이 사찰이 텅 비어버리면 선생의 손때가 묻은 자취와 책의 목판은 지켜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에 경주부사 권상구는 판결문에서 정혜사에 배정된 선자지 6묶음을 감해줄 것을 명령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승정원일기』,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74년 3월 權仲垕 등이 慶州府使에게 屬寺인 定惠寺 승려들에 대한 身役을 免除해 달라고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674년 3월 權仲垕 등이 慶州府使에게 屬寺인 定惠寺 승려들에 대한 身役을 免除해 달라고 요청하는 上書이다. 옥산서원은 창건이래로 지방관과 향인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慶州府尹 李齊閔은 서원 인근의 定惠·斗德寺沙器·水鐵·冶鐵店 등을 서원에 소속시켰다. 서원이 건립된 후 조선왕조의 서원진흥책에 힘입어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피봉사자인 회재 이언적1610년 東方五賢의 한분으로 文廟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더욱 크게 증대되었다. 이후 옥산서원경주부 유림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면서 지역 유림들의 교육 및 정치·사회적 활동의 중심지로 역할 하였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한 사회·경제·정치적 혼란은 옥산서원의 위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존 서원에 주어지던 각종 혜택들이 侵害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침해는 주로 屬寺와 船隻, 院屬 들에게서 발생하였다. 특히 정혜사는 서원 인근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피봉사자인 이언적의 유적과 문집 및 저술의 목판이 보관된 곳으로서 서원의 重處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담당하였는데, 18세기 초에 작성된 것을 추정되는 옥산서원『謄錄』에는 醬, 酒의 제조와 창문과 벽보의 도배, 돗자리 제작 및 포도·松花·산초 등의 공급은 승려들이 담당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평소 유생의 供饋에 필요한 것들로서 屬寺로부터의 공급이 끊기면 서원으로서는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생들이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山寺[山堂]에서 居接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때 유생들의 수발을 담당하기 위해 齋直과 院奴를 使喚토록 했지만, 供饋는 기본적으로 승려들의 담당이었다. 옥산서원에서도 거접으로 인한 僧徒들의 피해가 발생함을 인정하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물 값으로 租 3石, 소금 5斗를 내어주고 있었다. 이처럼 정혜사는 경제적·교육적 측면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옥산서원 측으로서는 정혜사의 존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옥산서원에서는 거듭된 침해로부터 屬寺를 보호하기 위하여 꾸준히 完文을 성급 받고, 한편으로는 낡은 사찰의 수리와 重修를 적극 지원함으로써 승려들의 逃散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1785년에 작성된 󰡔本寺重修後餘錢置簿󰡕에서는 1780년 폐허가 된 정혜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한 후 승려들을 새로이 모집하고, 그들의 逃散을 막기 위해 엄중한 立規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거듭된 노력은 정혜사1834년 소실된 후 서원의 재력이 부족하여 사찰을 중수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본 상서에서는 옥산서원의 위상을 내세워 정혜사 승려들에 대한 관의 침탈을 막으려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보면 옥산서원晦齋 李先生을 위해 창건하였는데, 서원에서 1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定惠寺라는 오래된 사찰이 있다고 했다. 이 사찰은 先生이 일찍이 왕래하며 책을 읽던 곳으로서 건물의 창과 벽 사이에 선생의 親筆 詩文이 남아 있기에 영원히 서원에 소속시켜 先生文集과 여러 책의 목판을 모두 여기에 소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부터 本邑과 巡營에서 마음을 다해 돌아보고 보호하는 것이 국가 중대한 賦役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면제시켜 승려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목판을 수호하게 하였으니, 이 사찰을 보호함이 이때부터가 아니겠냐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관례에 따라 다른 사찰을 보호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다른 사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이전 수령들에게 보호를 받아왔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扇子紙 6卷을 求請하며 官家로부터 발급된 牌를 내놓으며 바치도록 독촉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찰은 평소 쇠잔한 약간의 승려들이 얇은 종이를 겨우 떠서 생계를 도모하는 재물로 삼고 있기 때문에, 扇紙에 可合되는 두터운 것은 본래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흉년을 겪으면서 사찰의 승려들이 대부분 죽었기에 종이를 만들 인력도 부족하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관가에서 扇子紙를 계속 요구하여서, 만약 다른 곳에서 사들여 상납하게 된다면 굶주림은 바야흐로 극에 달할 것이며, 종이를 사는 값을 마련할 길도 없다고 했다. 또한, 만약 힘을 다해 스스로 처리하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종이의 품질은 일찍이 浮取한 적이 없기에, 겨우 남아 있는 5~6명의 무리로는 물건을 납품할 힘이 전혀 없어 바리때기를 매고 서서 하루 아침저녁을 있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扇子紙를 만드는 일로 이 사찰이 텅 비어버리면 선생의 손때가 묻은 자취와 책의 목판은 지켜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에 慶州府使 權尙矩는 판결문에서 定惠寺에 배정된 扇子紙 6권을 감해줄 것을 명령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정서등록』에 수록된 것이다. 『정서등록』은 監營과 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라고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呈書登錄』은 감영병영, 그리고 경주부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실제 『정서등록』에는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上書 46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田畓, 除役村 및 奴婢, 屬寺, 屬店 등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이들 전답과 인력들에 대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옥산서원의 경제적 기반 형성과정에는 지방관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서등록』에 있는 문서들은 대체로 연도순으로 되어 있지만 일부 문서는 시기가 섞여 있고, 1612년 6월 6일 문서의 경우 내용이 없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승정원일기』,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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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甲寅三月日權仲垕等謹再拜上書于城主相國閤下
玉山書院爲我晦齋李先生創建而距院未滿一里許有
惠古刹刹乃先生所嘗往來讀書處也窓壁間題詠手迹
至今尙新仍以此寺永屬本院先生文集及諸書板本皆藏
於是故自前巡營本邑靡不盡心顧護至於國家重役亦
皆蠲減使之安保僧徒得以守護板閣則此寺之完護
匪今斯今而亦非他循例完護之比也卽今求請扇子紙六
卷自官出牌督納而此寺素稱殘弊若干僧徒僅得浮
取薄紙以爲謀生之資而敦厚可合於扇紙者本非其
所能自經凶荒流死殆盡將欲他處貿納則飢火方極備
價無路將盡力自辦則如此紙品未曾浮取五六僅存之輩萬
無支應之力荷鉢而立將不保朝夕此寺一空則先生手跡與
書板守護誠難玆非惕然顧念處乎伏願閤下俯察多
士之懇特除是寺之役則其爲幸顧不大哉生等無任祈懇
之至謹冒昧以達 題音定惠寺分定扇子紙六卷減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