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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 생원(生員) 이현(李垷)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B.1655.4713-20150630.Y155012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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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이현, 경상좌병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55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55년 생원(生員) 이현(李垷) 등 상서(上書)
1655년 9월 생원 이현 등이 병마절도사에게 흥해장기의 선박을 관리하는 격군과 연일의 소금가마를 담당하는 염부 등과 속사인 정혜사 승려들에 대한 신역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서이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회재 이언적을 편히 모시는 곳으로서, 선조가 사액한 서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동방오현의 한 분이자 문묘종묘에 배향된 회재를 제향하는 곳으로 선왕도 인정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속사인 정혜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서원의 1리 밖에 위치한 오래된 사찰로서 회재가 풍경을 감상하고 책을 읽던 곳인데, 그가 손수 쓴 필적이 지금까지 창문과 벽 사이에 남아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회재의 문집과 저술 그리고 여러 선생의 서책을 새긴 목판이 그 사찰 속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런 까닭으로 승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전 병마절도사로 이 고을 지나던 사람은 부역을 막고, 서원을 보호하라는 완문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처럼 각 아문의 여러 부역을 일체 면제하고 세 명의 늙고 쇠약한 승려를 보존하여 서원을 수호하는 바탕으로 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서원이 어렵게 마련한 어선을 운영할 어부를 모집하여 흥해장기 등의 관아에 정박해 있고, 또 연일 땅에 소금가마를 구입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채소를 절이는 재료를 공급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자들에게 신역을 면제하는 것을 사찰의 승려와 같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와서 우두머리 승려가 초하루마다 병영에 종이를 납부하는 것으로 추궁을 당하고, 여럿 모아놓은 어부들은 병영에 어물을 납품하기 위해 살아 있는 어류를 모아들이고 있어, 만약 병마절도사가 너그럽게 신역을 감해주는 명령이 있지 않으면 여러 가지 어로의 일들이 고전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병마절도사가 자신들의 사정을 헤아려 특별히 신역을 너그럽게 감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선례에 의거하여 어부들과 사찰의 승려에게 완문을 발급하여 서원을 보존하게 해준다면 병마절도사의 문교를 숭상하는 정성이 언제나 드러나 영남에서 영원토록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병마절도사는 판결문에서 이 장문을 보면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라고 감탄하며, 나중에 각각의 사람들과 사찰을 기록하고, 아울러 완문을 발급하도록 상고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55년 9월 生員 李垷 등이 兵馬節度使에게 興海長鬐의 船隻을 관리하는 格軍과 延日의 鹽釜를 담당하는 鹽夫 등과 屬寺인 定惠寺 승려들에 대한 身役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655년 9월 生員 李垷 등이 兵馬節度使에게 興海長鬐의 船隻을 관리하는 格軍과 延日의 鹽釜를 담당하는 鹽夫 등과 屬寺인 定惠寺 승려들에 대한 身役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上書이다. 옥산서원1572년 건립 당시부터 지방관과 鄕人들의 도움으로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있었다. 특히 慶州府尹 李齊閔은 창건 역사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면서, 서원 인근의 定惠·斗德 兩寺 및 沙器·水鐵·冶鐵 各店을 서원에 소속시켜 경제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內外孫과 鄕人들이 협조하여 경주부에 약간의 田을 두고, 청도밀양에도 李浚이 전답을 약간 납입하였다. 이외에도 1578년에는 17구의 관노비가 移屬되었으며, 영일·흥해·장기 등지에서는 船隻과 鹽盆을 두고 이를 관리할 海夫와 鹽干을 확보하여 서원에 필요한 魚鹽을 공급받았다. 또한 조정과 수령은 이들 속점과 속사, 선척과 인부들에 대한 身役과 관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처럼 옥산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확대되는 데는 서원 자체의 노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官의 지원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17세기 이래로 院生·良丁·下典·齋直·都色·守直軍 등으로 불리는 私募屬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서원의 중요한 재원이 되어갔다. 이처럼 옥산서원은 경제적 기반을 건립 당시부터 확대·강화하면서 이를 토대로 조선후기 경주사회를 주도해 갈 수 있었다. 여기에 배향자인 회재 이언적1610년 東方五賢의 한 분으로 文廟에 종사됨으로써 옥산서원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옥산서원은 이러한 위상을 바탕으로 서원의 재산이 침해를 당할 때마다 수령에게 청원하여 免役·免稅의 특혜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원의 위상도 임진·병자의 兩亂을 겪으면서 국가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소 침해를 당하여 이들이 요청하는 면역·면세의 요구가 묵살되거나, 부분적으로 허가되기도 했다. 본 상서는 바로 양란이후 국가의 재건이 우선시되던 당시에 옥산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침해당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이에 유생들은 면역·면세를 받아야 되는 당위성을 제기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특혜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옥산서원晦齋 李彦迪을 편히 모시는 곳으로서, 宣祖가 賜額한 서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동방오현의 한분이자 文廟宗廟에 배향된 회재를 제향하는 곳으로 先王도 인정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속사인 定惠寺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서원의 1리 밖에 위치한 오래된 사찰로서 회재가 풍경을 감상하고 책을 읽던 곳인데, 그가 손수 쓴 필적이 지금까지 창문과 벽 사이에 남아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회재문집󰡕과 󰡔求仁錄󰡕�, 󰡔九經衍義󰡕 그리고 여러 선생의 서책을 새긴 목판이 그 사찰 속에 보관되어 있기에 승려로 하여금 典守토록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전 병마절도사로서 이 고을 지나던 사람은 賦役을 막고 서원을 보호하라는 完文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처럼 각 衙門의 여러 賦役을 一切 면제하고 세 명의 늙고 쇠약한 승려를 보존하여 서원을 수호하는 바탕으로 삼은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원이 어렵게 마련한 어선이 格軍을 모집하여 興海長鬐 등의 관아에 정박해 있고, 또 延日 땅에 鹽盆을 구입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채소를 절이는 재료를 공급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자들에게 身役을 면제하는 것을 사찰의 승려와 같이하였다고 했다. 상서에서는 전후 병마절도사의 이런 조치는 學宮을 호위하고 道理를 중시하는 뜻이 지극히 성대하였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와서 首僧이 초하루마다 兵營에 종이를 납부하는 것으로 추궁을 당하고, 여럿 모아놓은 海差(海夫)들은 병영에서 어물을 납품하기 위해 살아 있는 어류를 모아들이고 있어, 만약 병마절도사가 너그럽게 身役을 감해주는 명령이 있지 않으면 여러 가지 어로의 일들이 고전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병마절도사가 자신들의 사정을 惠諒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지금의 병마절도사에게 거듭된 경사는 학문하는 가문의 출신으로 일찍이 선대 현인의 풍모를 지니시고 남쪽 변방에 符節을 가지고 와서, 斯文을 떠받치고 보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할 것이니 학궁이 떨쳐 일어나고, 많은 선비들이 감동하여 일어나는 것은 오늘날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유생들은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살피고 받아들여 특별히 身役을 너그럽게 감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先例에 의거하여 어부들과 사찰의 승려에게 完文을 발급하여 서원을 보존하게 해준다면 병마절도사의 文敎를 숭상하는 정성이 언제나 드러나 嶺南에서 영원토록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 병마절도사는 판결문에서 이 狀文을 보면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라고 감탄하며, 나중에 각각의 사람들과 寺刹을 기록하고, 아울러 完文을 발급하도록 相考하여 施行하라고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정서등록』에 수록된 것이다. 『정서등록』은 監營과 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라고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呈書登錄』은 감영병영, 그리고 경주부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실제 『정서등록』에는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上書 46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田畓, 除役村 및 奴婢, 屬寺, 屬店 등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이들 전답과 인력들에 대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옥산서원의 경제적 기반 형성과정에는 지방관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서등록』에 있는 문서들은 대체로 연도순으로 되어 있지만 일부 문서는 시기가 섞여 있고, 1612년 6월 6일 문서의 경우 내용이 없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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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乙未九月日生員李垷等上書于 兵相國閤下伏以玉山書
晦齋李先生奉安之地而 宣廟賜額之院也院之一
里許有古刹曰定惠寺也是先生遊賞讀書之處而 先
生手書筆迹至今宛然於窓壁間 先生之文集求仁錄
九經衍義及諸子集鋟梓之板藏置於寺中而使僧典守
之故自前使相之過是邑者莫不有完文杜護之凡諸各
衙門雜役一切蠲減之使數三殘僧得以保存而爲書
院守護之地者其來舊矣且自書院艱備漁船而募得格
軍泊在於興海長鬐等官又買鹽盆於延日地以供多
士虀鹽之資而其所以完護者與寺僧一樣也則前後使
相之衛學宮重道之意至甚盛矣近年以來首僧則稱以
營納朔紙而侵責蝟集海差則稱以營下納魚物而聚斂
鱗生若不有 閤下寬減之令則諸般漁侵之役將不免
其苦矣幸今我 閤下積慶詩禮之門而早膺 先賢
之風按節南蕃以扶衛斯文爲先則學宮之振起多
士之興作其不在於今日歟伏願 閤下俯採諸生之懇特下
寬減之令依例成給完文於海夫寺僧使得保存則閤
下右文之誠出尋常萬萬而永有辭於吾南矣謹冒昧以
達 題音觀此狀文則孰不動念處乎後錄各人等
及寺刹幷以完文成給爲去乎相考施行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