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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유생(儒生) 손길(孫佶)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B.1645.4713-20150630.Y155012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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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경상좌병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45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45년 유생(儒生) 손길(孫佶) 등 상서(上書)
1645년 11월에 유생 손길 등이 병마절도사에게 소속 선부의 신역을 면제해 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옥산서원이 건립될 초기에 약간의 선박을 매입하고, 호조에 청원서를 보내 완문을 받아 현인을 양성하는 자산으로 삼은 것이 그 유래가 아직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 오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선박을 운영하는 자들에게 병영에서 무역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한 몸에 두 가지 신역을 담당하게 되어 그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워한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허둥지둥 멍하게 눈물을 흘리며 항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이렇게 선박에 대하여 청원한 자가 장기에 거주하는 덕산, 진금 등이라는 것이다. 이에 서원에서는 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고 병마절도사에게 특별히 신역을 면제해 주길 청원하였다. 즉 이들이 서원의 배를 운영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여 선비를 양성하는 자산으로 삼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병마절도사는 판결문에서 무역을 하는 어물은 자신이 사사롭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장병들에게 공급하는 것으로 부득이한 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상서의 말과 같다면 진금 등을 지금 이후에는 무역을 하지 말도록 하되 상세히 사실을 서로 살펴서 실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7~18세기 경주 옥산서원의 토지재원과 그 운영」, 『태동고전연구』16,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199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45년 11월에 儒生 孫佶 등이 兵馬節度使에게 소속 船夫의 身役을 면제해 주길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645년 11월에 儒生 孫佶 등이 병마절도사에게 서원 소속 船夫들의 신역을 면제해 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丙子胡亂 이래로 국가 재건 사업에 가능한 모든 인력이 모두 동원되면서, 옥산서원은 그 과정에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즉 서원 운영에 필요한 인력들이 각 종 身役에 차출되어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屬寺인 定惠寺의 승려들이 城役에 차출된 것이나, 서원 건립초기부터 약간의 선박을 매입하여 그 운영을 맡겠단 船夫들이 兵營에 소속되어 군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일로 승려들이 逃散할 지경에 이르렀고, 소속 어부들 역시 더 이상 서원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원과 군역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부들의 하소연이 잇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부들이 납부하던 魚鹽은 서원에 소용되는 분량을 제외하고는 무역을 통해 서원 재정에 기여하고 있었다. 서원측은 전란으로 황폐화된 농지와 도산한 노비들로 인해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면역·면세의 권한을 가진 지방관에게 하소연하여 서원 재정을 유지하려고 이 상서를 올렸던 것이다. 이 상서를 보면 옥산서원 소속 선박을 운영할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히 身役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들은 長鬐에 거주하는 德山과 進金 등이었는데, 兵營에서 貿販하는 일이 그들에게 지어져서 한 몸으로 두 가지 일, 즉 서원에 어염을 바치는 것과 병영의 일을 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옥산서원 유생들이 나서 특별히 學宮을 생각하여 그들에 대한 신역을 면제하여, 선비를 양성하는 자산으로 삼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병마절도사는 題音에서 貿販하는 魚物은 자신이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에게 공급하는 것으로 부득이한 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서의 말과 같다면 진금 등을 지금 이후에는 貿販을 하지 말도록 하되, 철저히 相考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정서등록』에 수록된 것이다. 『정서등록』은 監營과 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라고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呈書登錄』은 감영병영, 그리고 경주부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실제 『정서등록』에는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上書 46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田畓, 除役村 및 奴婢, 屬寺, 屬店 등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이들 전답과 인력들에 대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옥산서원의 경제적 기반 형성과정에는 지방관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서등록』에 있는 문서들은 대체로 연도순으로 되어 있지만 일부 문서는 시기가 섞여 있고, 1612년 6월 6일 문서의 경우 내용이 없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7~18세기 경주 옥산서원의 토지재원과 그 운영」, 『태동고전연구』16,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199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乙酉十一月日儒生孫佶等上書于兵馬節度使相國閤下伏以弊院肇建之初買得
若干船隻而呈戶曹受完文以爲養賢之資者其來尙矣顧其船隻所呈者長鬐居德
山進金等數人而已今者 營下貿販侵及於渠等一身兩役勢所難堪遑遑惘泣無所控
告伏乞 閤下顧念學宮 特爲完減使之專役於弊院以資養士之如何生等無
任祈懇之至 △題音質敗魚物非兵使之私用乃將士所供乙仍于出於不得已之事
書辭如此進金乙今後勿爲貿販爲去乎相考知悉向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