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년 옥산서원 유생 진사 이상일 등 상서
1629년(인조 7) 2월에 유생 진사 이상일 등이 장기에 있는 옥산서원 소속 선척과 선부에 대한 부역을 면제해 달라고 경주부윤에게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산서원은 건립 이래로 지방관과 사림들의 협조로 경제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서원에 소속된 자들에 대한 면역과 토지 등의 면세는 지방관의 재량에 의해 결정되었기에 신임 수령과 정치·사회적 영향을 다소 받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원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해지고, 관주도의 향촌지배가 강화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서원에서는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토지와 노비, 원속 뿐만 아니라 서원 소속 사찰과 사기점, 야철점과 같은 속점 등에 대한 관리도 강화해 나갔는데, 여기에서도 수령의 재가가 필요하였다.
한편, 옥산서원은 동해안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장기에 서원 스스로 배와 선부를 갖추어 그들에게 서원에 필요한 어물과 소금을 납품받았다. 서원측은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그들 선부와 배에 대한 면역과 면세를 보장하고, 그 대가로서 어물 등을 납품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서가 경주부윤에게 전달되었던 시기에는 장기에 있던 배와 선부들이 쌀을 운송하는데 끌려가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옥산서원측은 상서에서 이전 관찰사들의 면역 사례를 들어 서원의 물품을 마련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해당 선부와 배를 운송의 역에서 빼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경주부윤은 옥산서원 유생들의 뜻을 물리지 못하고 판결문을 통해 원속 선척은 마땅히 굳건히 완호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재 쌀을 옮기는 일 역시 긴급한 일이니 한번만 왕래하고 나면 다시는 책임을 추궁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즉, 이후 옥산서원 선척, 어부에 대한 면역을 명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