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경주(慶州) 유생(儒生) 진사(進士) 이상일(李尙一) 등 상서(上書)
1627년 11월 8일에 경주 유생 진사 이상일 등이 속사인 정혜사 승려들의 신역을 면제해 줄 것을 병마절도사에게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산서원 유생들은 병마절도사가 지방의 군무를 전결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것은 단지 군사 업무를 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문교를 숭상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뜻을 항상 베풀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을 남몰래 들었을 때 진실로 애모하고 마음이 숙연해졌다고 하면서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도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의 건립 사실과 속사인 정혜사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소속 승려들에 대한 가중한 신역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병사가 그 곡절에 밝지 못하셔서 감히 아뢴다고 하면서 이러한 면역 조치가 곧 문교를 숭상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당시 정혜사 승려들은 5~6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회재 이언적의 자취가 남겨진 사찰을 수호하는 것 외에도 회재의 문집 및 저술, 경주부에서 제작된 목판 등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병영의 유나승이 이들에게 매달 신발의 납품과 콩 삶는 일을 시키고 심하게 감독함으로 인해 이들의 업무가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승려들이 신역을 피하여 도망하여 흩어지는 사태를 방지하여 회재의 자취와 목판이 잘 관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병마절도사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병마절도사는 유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자신이 업무를 담당하는 기간 내에 한하여 일절 신역을 감면하고, 만약 정혜사 승려들을 침범하고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결박하여 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실제 정혜사에서는 목판의 수호 외에도 대가를 받고 서원에 필요한 채소와 종이, 신발 등을 정기적으로 공급하고, 사찰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음식을 공급하기도 했다. 서원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유생의 교육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공급하는 종이와 음식은 옥산서원으로서는 재정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유생들이 나서서 소속 승려들의 신역을 면제받는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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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