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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경주(慶州) 유생(儒生) 진사(進士) 이상일(李尙一)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B.1627.4713-20150630.Y155012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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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이상일, 경상좌병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작성시기 1627
형태사항 크기: 28 X 22.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2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627년 경주(慶州) 유생(儒生) 진사(進士) 이상일(李尙一) 등 상서(上書)
1627년 11월 8일에 경주 유생 진사 이상일 등이 속사인 정혜사 승려들의 신역을 면제해 줄 것을 병마절도사에게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산서원 유생들은 병마절도사가 지방의 군무를 전결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것은 단지 군사 업무를 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문교를 숭상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뜻을 항상 베풀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을 남몰래 들었을 때 진실로 애모하고 마음이 숙연해졌다고 하면서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도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의 건립 사실과 속사인 정혜사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소속 승려들에 대한 가중한 신역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병사가 그 곡절에 밝지 못하셔서 감히 아뢴다고 하면서 이러한 면역 조치가 곧 문교를 숭상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당시 정혜사 승려들은 5~6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회재 이언적의 자취가 남겨진 사찰을 수호하는 것 외에도 회재의 문집 및 저술, 경주부에서 제작된 목판 등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병영의 유나승이 이들에게 매달 신발의 납품과 콩 삶는 일을 시키고 심하게 감독함으로 인해 이들의 업무가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승려들이 신역을 피하여 도망하여 흩어지는 사태를 방지하여 회재의 자취와 목판이 잘 관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병마절도사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병마절도사는 유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자신이 업무를 담당하는 기간 내에 한하여 일절 신역을 감면하고, 만약 정혜사 승려들을 침범하고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결박하여 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실제 정혜사에서는 목판의 수호 외에도 대가를 받고 서원에 필요한 채소와 종이, 신발 등을 정기적으로 공급하고, 사찰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음식을 공급하기도 했다. 서원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유생의 교육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공급하는 종이와 음식은 옥산서원으로서는 재정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유생들이 나서서 소속 승려들의 신역을 면제받는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7~18세기 경주 옥산서원의 토지재원과 그 운영」, 『태동고전연구』16,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199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627년 11월 8일에 慶州 儒生 進士 李尙一 등이 屬寺인 定惠寺 승려들의 身役을 免除해 줄 것을 兵馬節度使에게 요청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627년 11월 8일에 慶州 儒生 進士 李尙一 등이 屬寺인 定惠寺 승려들의 身役을 免除해 줄 것을 兵馬節度使에게 요청하는 上書이다. 옥산서원 유생들은 병마절도사가 지방의 군무를 專決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신 것은 단지 兵政을 일신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문교를 숭상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뜻을 항상 베풀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을 남몰래 들었을 때 진실로 애모하고 마음이 숙연해졌다고 하면서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도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의 건립 사실과 속사인 정혜사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소속 승려들에 대한 加重한 身役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兵使가 그 곡절에 밝지 못하셔서 감히 아뢴다고 하면서 이러한 면역 조치가 곧 文敎를 숭상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옥산서원晦齋 李彦迪의 옛집 곁에 있으며, 회재를 위해 서원을 건립하여 존숭해온 것이 60년이 된다고 하였다. 서원이 있는 마을에는 定惠寺라고 하는 사찰이 있는데 진실로 선생께서 책을 읽고 거닐며 휴식하던 곳으로서, 아직도 벽에는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다고 하였다. 또한 서원을 건립한 이래로 선생의 문집과 여러 책의 목판을 소장하고 있기에 더욱 애중히 보호해 왔으며, 이것은 정혜사의 승려들이 담당하였던 일로서 난리와 혼란을 겪을 때도 다른 身役을 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있는 승려 5~6명은 兵營에 維那僧(齎를 올릴 때 儀式과 節次를 지휘하는 승려)이라고 부르는 자가 지금 8월 이후부터 병영에 초하루에 신발을 납품하라고 하며 매달 거두어 가고, 또한 콩을 삶으라고 시키고는 심하게 감독을 한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일은 전날에 없던 것으로서 정혜사 승려들의 세력이 고립되고 약하여 보살피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면서, 옛날의 사례를 특별히 참조하시어 그들을 침범하지 말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옥산서원이 우리나라의 이른바 명소라는 것을 생각하여, 도내를 순찰하실 때에 혹시라도 서원을 지나다 한 번 방문한다면 자신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알 것이라고 거듭 말하였다. 옥산서원 유생들의 요청에 대하여 병마절도사는 기간 내에 한하여 일절 身役을 감면한 후 만약 침범하고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결박한 후에 와서 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혜사 승려들의 역할이다. 이들은 회재의 手迹뿐만 아니라 이후 판각된 회재의 문집, 저술목판 및 경주부에서 제작한 판목을 보관하고 있었다. 또한 판목의 수리와 제작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세기 초반 정혜사가 燒失되어 刊所가 만들어지면서 그 업무를 계승하여 목판을 보관·수리·제작하였던 것에서도 짐작된다. 나아가 서원에 필요한 야채 및 신발 등을 공급과 居接유생의 供饋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주요 업무가 판목의 관리였기에 그 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일정한 ㅤㅅㅏㄽ을 지급하였다. 이처럼 서원의 교육·경제에 한 몫을 담당하였기에 전란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서원 측으로서는 이들의 보존이 시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옥산서원 『정서등록』에 수록된 것이다. 『정서등록』은 監營과 兵營, 그리고 慶州府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라고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수록된 자료들은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상서 46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자료는 연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일부 있지만 대체로 옥산서원 초창기의 경제적 규모와 재산 형성과정과 운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呈書登錄』은 감영병영, 그리고 경주부와 列邑에 呈書한 것들이 쌓여 책을 이루고 두루마리가 뒤섞여 간직할 수 없게 되자, 呈書와 題音을 별도의 한 책으로 엮어서 추후에 참고할 典據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즉, 呈書가 너무 많아서 보관이 어려워지자 이를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실제 『정서등록』에는 1588년 이전부터 1683년까지 약 100년 동안 작성된 上書 46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서원 田畓, 除役村 및 奴婢, 屬寺, 屬店 등 서원 경제와 관련된 것들로서 이들 전답과 인력들에 대한 免稅, 分給, 免役 등을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옥산서원의 경제적 기반 형성과정에는 지방관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서등록』에 있는 문서들은 대체로 연도순으로 되어 있지만 일부 문서는 시기가 섞여 있고, 1612년 6월 6일 문서의 경우 내용이 없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소수,옥산,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선후기의 서원-옥산서원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2, 이수환, 국사편찬위원회, 1992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집문당, 2004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노비경영」, 『태동고전연구』17,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00
「조선후기 경주 옥산서원의 원속 파악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35, 손병규, 조선시대사학회, 2005
「17~18세기 경주 옥산서원의 토지재원과 그 운영」, 『태동고전연구』16, 손병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1999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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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天啓七年十一月八日慶州儒生進士李尙一等上書于 兵馬節度使
相國閤下伏以生等竊聞 閤下專閫南來非但兵政一新右文
尊賢之意常在於施措之際生等固嘗愛慕而斂服焉
故敢玆開喙於 閤下之前矣弊府有玉山書院乃在 晦齋
先生舊宅之傍爲先生建院尊尙于今六十年矣其洞之中
有曰定惠寺實先生讀書游息之地而壁間尙有 先生手
迹自建書院以來又藏 先生文集諸板本矣以是尤愛重之
保護之雖經亂離搶攘之際而亦不以他役加之矣今有僧徒
五六輩其勢孤弱猶恐不能看護而 營下維那僧稱號者自
今八月以後營納朔鞋稱云每月收捧而又使燻造方督受
太此前日之所無而 閤下亦必未燭其曲折故敢此陳達焉伏
願 閤下特照舊例使之勿侵則此亦右文尊賢之一事也
且念玉山書院東方之所謂名區也 閤下巡道之節徜或過開
口而一訪焉則亦知今日生等之言矣無任祈懇之至謹買昧以
達 題音限等內一切減後如有侵責者結縛來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