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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慶尙北道) 신녕군(新寧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906~1914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914.4723-20150630.Y151050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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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914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북도(慶尙北道) 신녕군(新寧郡)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906~1914년 기록
경상북도(慶尙北道) 신녕군(新寧郡)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906~1914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는 『고왕록』에 수록된 사적 중 마지막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1906년부터 고을 사람 중 몇몇이 향교 전답을 마음대로 팔아먹었고, 이로 인해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1908년 운영비를 새롭게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향교 재정이 학교(學校) 재정으로 전용되고 말았다. 근대식 교육기관이 지방에 설립됨으로써, 관학(官學)이었던 향교 재정이 전용된 것이다. 이로 인해 종전에 향교가 가지고 있던 교육 기능은 상실되었고, 향례(享禮) 비용도 마련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지만, 신녕향교는 직원(直員) 김덕해(金德海)가 자비를 내어 놓고 정성을 다했기에, 몇 년 동안 의례를 행할 수가 있었다. 재정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뜻 있는 유림들에 의해 어렵게 운영되는 향교의 실태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가운데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녕군영천군에 합속되고, 이로 인해 신녕향교의 문묘도 문을 닫게 된다. 이상의 과정은 20세기 초반 시대적 변화 속에 향교 운영이 위축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 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北道 新寧郡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906~1914년의 향교 운영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北道 新寧郡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906~1914년의 간략한 향교 운영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는 『고왕록』에 수록된 연도별 사적 가운데 마지막 기록이 되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906년 이후 校畓·齋畓·射亭畓 100여 斗落을 고을 사람 몇몇과 司果 朴某가 마음대로 팔아먹었다. 그런 까닭에 1908년 4월 20일, 明倫堂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鄕會를 크게 열었다. 그 결과 會員 200여인이 聯名해 校畓 97斗落을 방매하기로 했다. 방매해서 얻은 돈은 2,000냥으로, 이 돈은 留置하여 매년 이자를 놓아 증식할 것이며, 司果 權芝洛을 관리자로 추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해 겨울, 郡의 主事 朴祥琦가 郡守의 자리를 代理하면서, 향교에 있는 것을 가져다 써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1909년 봄, 金德海가 향교의 直員을 맡았다. 향교에 남은 전답 50여 두락이 學校 재정으로 전용되어 쓸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김해덕이 향례비용을 스스로 마련하여 春秋 釋菜禮와 朔望禮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매번 아침 일찍 일어나 大成殿에 香謁하고, 東西位席을 쓸고 닦고 하는 것이 3년 동안 한 결 같았다.
1914년 2월, 신녕군영천군에 합쳐졌다. 그래서 모든 文簿가 이날 인계되었는데, 郡守가 來到하여 향교의 돈을 수거해 갔다. 이로 인해 직원 韓鍾洙는 ?香의 禮를 거행할 수 없었다. 7월 20일, 郡의 參事 曹秉烈이 8월 上丁이 다가오는 시기에, 文廟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한종수에게 문묘의 문을 닫아 안타깝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때 永川郡守南泌佑였으며, 신녕의 文廟 직원은 한종수였다.
자료적 가치
20세기 초반 향교 운영이 위축되는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 재정의 방만한 운영으로 고을 사람들이 향교 재정을 새롭게 확보하였으나, 이 돈은 學校 재정으로 전용되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근대식 교육기관이 지방에 설립됨에 따라, 종전의 향교가 가지고 있던 官學으로서의 교육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재정은 대부분 근대식 학교로 전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韓末 향교의 재정은 享禮를 거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으며, 뜻있는 유림들에 의해 겨우 체모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자, 신녕향교처럼 합속되어 버린 고을의 향교는 공식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丙午以後校畓及齋畓射亭畓百餘斗地爲鄕人幾輩及司果朴某擅賣自用故
戊申四月二十日大設鄕會於倫堂會員二百餘人聯名賣校畓九十七斗落價結二千兩
留置信實者每年以利支用之意結議推司果權芝洛爲掌財員是年冬郡
朴祥琦郡守之任引用於學校而無餘
己酉金德海校宮爲直員時校宮所餘畓五十餘斗地入於學校無支用金德海自齎
享費行春秋釋奠每朔望晨起香謁大成殿東西位席掃洗之凡三歲而始終如一
甲寅二月本郡合於永川文簿全繼是日郡守來到于校宮開金收去直員韓鍾洙不得
行?香之禮【永川郡守南泌佑新寧文廟直員韓鍾洙
七月二十日郡參事曹秉烈以八月上丁將近以爲文廟之門未開則大有所未
安也抵書于韓鍾洙書曰世道滄桑人事旋阻謹詢凉生萱?節萬寧侍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