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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79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879.4723-20150630.Y151050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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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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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879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79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879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1879년 기록에는 향인(鄕人) 황석도(黃錫道)의 자금 기부와 명륜당(明倫堂) 보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황석도신녕향교 측이 자금을 상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돈을 기부해 상환할 돈을 보상(報償)하였다. 훼손된 명륜당은 재용의 부족으로 보수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한 상태였는데, 국상(國喪)으로 향례(享禮)를 거행하지 않아 자금에 여유가 생겨, 1879년이 되어서야 보수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향교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보여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79黃錫道의 기부와 明倫堂 보수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79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 1877년 2월, 校長 權大秉이 40냥을 出債하여, 春享禮의 비용으로 준비하였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또한 당시 掌議였던 曹錫龜도 함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상의 돈을 報償할 방법이 없어 歸屬시케게 되었다. 또한 庫子에게 貸下한 돈 120냥은 여러 번 官에 청원한 까닭에, 1879년 3월 鄕會에서 鄕人 黃錫道가 스스로 돈 130냥을 내어 주었다. 이 돈으로 우선 권대병에게 出債한 돈을 報償하였다. 나머지 90냥은 庫子에게 貸下한 돈을 報償해서, 30냥이 남게 되었다. 이때가 1879년 4월이며, 掌議는 金斗寅丁泰夏가 맡고 있었다. 1879년 7월 明倫堂의 西上房이 여러 해 동안 무너지고 훼손되어, 매번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에 이르면, 4면의 ?壁 곳곳마다 風穴이 생긴다. 또한 갑자기 얼음장이 되었다가 따뜻해짐이 기약 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朔望禮를 행할 때 齋任들이 숙박하기 어려워 매우 고생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혹 西齋에서 숙박하기도 하고, 혹 廚舍에서 숙박하기도 하니, 그 모양세가 극도로 難便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난 1878년 國喪을 당하여, 享禮가 거행되지 않아, 향교에서 傳掌하는 돈에서 11냥 가량이 남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수하는 계획을 세워, 年前에 무너지고 훼손된 것과 오랫동안 廢해 있었던 冷突을 새롭게 하였다. 이때가 1879년 11월로 도유사는 權錫九였으며, 장의는 김두인정태하가 맡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다. 본 자료에서는 특히 향교의 재정적 어려움이 많이 노출되어 있다. 당시 신녕향교는 교임에게 부담시킨 債錢과 하전에게 貸下한 돈을 제대로 報償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비단 신녕향교만의 현상이 아니었는데, 대체로 향교의 열악한 재정 상태와 방만한 재정 운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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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丁丑二月日茅山權校長大秉氏出債四十兩備用于
春享禮而不幸棄世其時掌議曹錫龜亦同逝右錢報償無路
歸屬且庫子貸下錢一百二十兩也累至呈官故己卯三月日鄕會
之席鄕人黃錫道自爲擔當出錢一百三十兩茅山錢依本報償庫
子錢減其三十兩報償九十兩玆記以示來者

己卯四月日掌議金斗寅
丁泰夏
己卯七月日倫堂西上房累年頹?每當祈寒之節四面?壁在在
風穴且突如氷室暖溫無期朔望之時齋任之處宿極爲艱辛緣此或設
西齋宿焉或在廚舍居焉其在?邈極爲難便玆際戊寅因國哀未行
享來校宮錢傳掌至爲十一兩餘矣因以爲修理之計年前頹?者及
冷突之久廢擧皆新塗而?記事實以示耳
己卯十一月日都有司權錫九
掌議金斗寅
丁泰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