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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71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871.4723-20150630.Y151050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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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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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871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71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871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871년에 있었던 향교 건물 보수와 전답 조사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1871년 향교 건물이 퇴락한 상태에서 재물의 부족으로 보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녕현감(新寧縣監)이 향교 수임(首任)인 도유사(都有司)를 직접 맡으면서 보수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비용은 유전(幼錢)을 거두어 충당했다고 하는데, 유전은 향교 유학(幼學)들에게 거두는 일종의 반강제적인 기부금으로 유전(儒錢)이라고도 불린다. 유전은 조선후기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한편, 그 해 11월에는 30년 간 유실(遺失)되었던 답(畓)을 조사해 향교 보유 전답으로 추환(推還)했다고 한다. 답의 유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교임(校任)의 방만한 운영과 착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조선후기 향교의 재정이 악화되는 여러 원인 중 하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71년의 향교 보수와 전답 조사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71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1871년의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본 향교의 東·西齋, 外三門, 廚舍가 썩고 파손되었으며,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한시 빨리 보수해야 한다. 그러나 향교의 형편이 심히 凋殘하여, 재물을 措辦하기 어려우니, 사람들이 오랫동안 개탄하고 안타까워하는 바이다. 그러다 6월에야 보수를 시작하였다. 당시 新寧縣監이 직접 향교의 都有司를 맡으면서, 재임과 향교 보수를 논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물을 구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신녕현감은 부득이 幼錢을 거두었고, 이것을 보수비용으로 삼았다. 幼錢으로 모두 248냥이 모였으며, 副吏 朴殷浩가 이를 관리하였다. 돈이 모이자 바로 인부를 모으고 伐木을 시작했다. 보수 공사는 7월 초 시작되어 10월 念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재물이 부족하였음에도 일을 이루어 낸 것은 모두 ‘興校’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사로 동재와 서재의 기운 곳은 바로 잡고 결손된 것은 보수하였다. 외삼문은 그 기둥을 改修하였고, 기운 廚舍는 철거하고 새롭게 세우니, 실로 보기가 아름다웠다. 이에 10월 26일 落成宴과 함께 白日場을 향교에서 設行하였다. 그리고 이때 校任을 擇差하였고, 禮曹營門에 각각 보고하였다.
11월에는 遺失한 전답을 조사하였다. 향교 보유 畓 중 세 군데가 30년 전부터 유실된 상태였지만, 있다는 말만 들었지 끝내 推還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가을 執禾 때, 字號와 卜數를 고증하여 畓의 위치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葛麻堤 아래 3두락지, 毛山堤 안 花田 6두락지, 옛 造山員 2두락지 세 곳을 찾아내었다. 당시 都有司는 신녕현감 黃芝仁이었으며, 재임은 權最鉉李炳璉이 맡고 있었다. 한편 자료 말미에는 幼學 李能休林相奎의 과거 응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먼저 주목되는 점은 신녕현감이 도유사를 직접 맡았다는 것이다. 원래 향교의 首任인 도유사는 고을의 元老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興學 또는 興校에 각별했던 수령들은 직접 도유사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도유사를 맡은 신녕현감은 幼錢을 거두었었다. 幼錢은 향교 幼學들에게 거두는 돈으로 儒錢이라고도 한다. 향교 재정이 부족하거나, 큰 행사가 있을 경우 향교 유생이나 지역 사족들에게 반강제적인 유전을 거두었는데, 이는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전답 조사 기록은 향교 보유 전답의 관리가 쉽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본 자료에서 전답이 30년 간 유실된 까닭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校任의 착복이나 방만한 운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조선후기 향교 재정을 악화시키는 여러 원인 중 하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本校東西齋外三門廚舍朽敗頹?傾覆之患迫在朝暮修葺之擧有所
不已而勢甚凋殘財難措辦士林之興歎已久有議未遂矣歲辛未六月日
有校宮修葺齋任擇差之令主?時帶校長與齋任謀所以改建修葺
而鳩財之道萬無區劃不得已分排幼錢將以爲需用之資出付副吏朴殷
收斂則數至二百四十八兩零募工伐木始役於七月初訖工於十月念財猶
不敷引用興校齋賣置錢六十餘兩次第脩擧兩齋則?者正而缺者補
外門則改其柱而立其傾廚舍則撤其舊而增其新輪奐改觀之美果何
如哉同年十月二十六日設白日場於校中齊會鄕員以告落成燕樂之意
焉校任擇差姓名成冊依關文一報禮曹一報營門

辛未十一月日都有司主?黃芝仁
齋任權最鉉
李炳璉
校畓之數三處遺失在於三十年前而只有傳來之言終無推還之地
矣今秋執禾時査得畓庫考其字號卜數則丁寧無疑因以逐庫
執禾一在葛麻堤下而爲三斗地一在毛山堤內爲花田六斗地一在古造山員
爲二斗地自此爲始遵而勿失千萬幸甚
辛未十一月日齋任上仝
幼學李能休癸酉式監試初場
幼學林相奎參漢城試二所初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