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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22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822.4723-20150630.Y151050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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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822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22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822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822년에 있었던 신녕향교 보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이 퇴락하고 지의(地衣) 등이 파손되어 있었는데, 1822신녕현감(新寧縣監) 홍철영(洪徹榮)영문(營門)에 청하여 보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 대성전을 비롯해 다른 부속 건물도 단장했으며, 재복(齋服)도 마련했다고 한다. 보수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여러 곳에서 재정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관(官)은 색리(色吏)를 파견해 벌목을 담당케 했으며, 대동세(大同稅)에서 보수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향교 유생들이 기금을 운영하기 위해 조직한 별판소(別辦所)의 전답도, 이때 방매되어 보수비용에 충당하였으며, 뜻있는 유생이 별도로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사례가 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22년의 향교 보수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22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822년의 향교 보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大成殿에 비가 새며, 地衣가 썩어 파손되었다. 또 東?·西?의 벽토가 떨어져 床卓에 쌓여 있고, 外築 장벽도 기울어 쓰러질 염려가 크다. 이에 鄕中에서 公議하여 여러 차례 營門에 呈訴하였다. 그런 가운데, 1822新寧縣監 洪徹榮이 향교 奉審 후, 營門에 이러한 사실을 稟報하였고, 營門은 다시 조정에 重修를 啓請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9월 12일 香祝이 도착했다. 시간이 급박해 그날 바로 明倫堂으로의 移安을 거행하고 보수 공사를 시작하였다. 10월 12일 보수가 마무리되고, 還安祭를 거행하였다. 대성전 중수 때 地衣를 비롯한 제반 什物은 無幣한 까닭에, 大同에서 會減했다. 또 公需舍가 朽敗하여 傾伏될 우려가 있었는데, 鄕中에서 舊材를 아울러 쓰지 않고, 새롭게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瓦家를 매입해 西翼廊 4칸, 門間 4칸의 방을 명륜당 서쪽 기둥 뒤편에 세웠다. 이때 色吏 韓儀哲이 伐木을 담당하였고, 나머지 物材는 別辦畓을 방매한 것으로 충당하였는데, 부족했던 60냥은 조금 넉넉한 곳에서 마련해 썼다. 이렇게 보수가 완료되었으니, 모두 수령의 후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良谷面에 거주하는 향교 儒生 朴喜得·朴喜元 형제가 돈 30緡을 내어 놓았다. 이 돈으로 齋服 6領을 마련하였다.
1822신녕향교 보수 당시 신녕현감홍철영이었으며, 齋任은 成學仁·楊東秀·曹寅燮이 맡고 있었다. 자료 말미에는 移安·還安 때의 祝文과 함께, 幼學 朴來源과 유학 金應斗의 과거 응시 사실도 기록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1822년의 신녕향교 보수 과정은 조선후기 향교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사례가 된다. 특히 보수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여러 곳에서 재용이 마련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신녕현감은 향교가 지방 官學을 대표했던 만큼, 보수 공사를 관리하였으며, 大同稅에서 보수비용을 지원해주었다. 향교가 관학임과 동시에 사족들의 자치 기구였기에, 향교 儒生들의 지원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別辦畓은 1746신녕향교의 유생들이 장기적으로 향교 移建 비용 마련을 위해 형성한 別辦所의 전답이다. 본 『고왕록』에는 향교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별판소에서 재용을 지원해 준 사례가 적지 않게 확인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聖廟多有雨漏地衣朽破且東西?壁土盡落堆積床卓外築墻壁傾壓
之患亦迫在朝暮鄕中公議齊發累次呈邑呈營歲壬午主?洪侯徹榮
審後稟報營門營門啓請重修而九月十二日香祝來到卽爲移安于倫堂廳守直
凡節異於他時不日董役還安于十月十二日祭儀一依享祀例而無幣帛聖
殿重修時地衣及諸般什物自大同會減且公需舍有朽敗傾伏之患故鄕中竝爲公
議舊材一倂不用正寢五間買瓦家立之西翼廊四間及門間四間倫堂西隅退理正
色吏韓儀哲一時伐木新成所入物財則自別辦畓賣用此外不足六十餘兩別備稍饒處
用之而此乃主?盛念之力也其時代良谷面朴喜得喜元兄弟以本校儒生敢生
從士之意自備錢三十緡以成六領齋服其志可嘉故?記前後顚末如右豈無
後攷之鑑耶
移安祝文雨漏殿宇赤白朽汚先告移安涓吉修改
還安祝文載葺載完廟完翼翼恭藏苾芬還安穆穆
主?洪徹榮齋任成學仁楊東秀曹寅燮

幼學朴來源甲申式初場
幼學金應斗參丙科初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