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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08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808.4723-20150630.Y15105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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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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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808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08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808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808에 있었던 신녕향교 건물 보수와 제기(祭器) 마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오랫동안 대성전(大成殿) 등의 향교 건물과 제기가 훼손된 상태였는데, 돈이 없어 보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1808년 장의(掌議) 김한권(金漢權)의 원납(願納)으로 비용을 마련한 뒤 보수를 완료하였다. 원납이 향교의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되는 사례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08년의 향교 보수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08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808년의 향교 보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大成殿의 담장과 벽에 훼손 된 곳이 있었다. 그래서 修飾하지는 의논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變通하지 못하였다. 수리할 재물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지난 1805新寧縣監 朴南源이 부임한 초기에 대성전을 배알하고 祭器와 담장을 두루 살펴보았다. 박남원은 물러나 齋儒들에게 제기와 宮牆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지금 신녕향교의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며, 재물을 내어 수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明倫堂도 기울어 一鄕이 근심하는 바라고 하였다. 이에 1808년 봄, 掌議 金漢權은 이러한 官家의 本意에 감동했고, 사림의 僉議를 생각하여, 재물을 판출해, 그것으로 썩고 파손된 곳의 재료를 바꾸었다. 이와 같이 향교가 새롭게 되니, 모두 ‘興學’에 뜻을 둔 官의 교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신녕현감박남원이었으며, 齋任은 金正宅 등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경제적 기반 중 하나인 願納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수령의 考課 대상 중 하나인 ‘興學’의 명분이 향교 진흥을 통해 이루어짐이 확인되는 자료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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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聖廟俎豆有缺墻壁幾?修飾之議補葺之計▣▣久矣財遺
一力不贍而凡在士林徒切慨歎矣?以乙丑之年主?朴南▣(源)
下車之初祗謁
聖廟周審祭器與墻圍退謂齋儒曰敬莫大於祭器而器有
殘缺贍莫高於宮墻而墻幾頹?不?儒林之齊悚抑亦
縣宰之用慮仍以辦財修飾祭器補葺墻圍且置校上未
修冊數而其於倫堂傾側迫在朝暮一鄕爲憂矣戊辰春掌議
金漢權感於官家之本意且念士林之僉願出意見辦財力材易
其朽瓦改其破旣斤且?繼以築墻修舊如新多士依歸何莫
非官先興學之化而士之趨向之效也然則公私勤勞蓋其不少豈
可無書庸識哉主?朴南源
齋任金正宅
徐▣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