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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06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806.4723-20150630.Y151050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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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806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806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806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806년에 있었던 향교 건물 보수와 고을 읍지(邑誌) 개수 사실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대성전(大成殿)의 풍차(風遮)와 담장이 훼손되어 있었으나, 재용의 부족으로 보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1806년 관에 청하여 원납(願納) 2명을 확보해 훼손된 건물을 수리하였다. 여기서 원납은 향교에 재물을 바치고 교생(校生)으로 등록된 원납교생(願納校生)을 뜻한다. 이들은 재물을 바치고 교생이 되는 대신 군역(軍役)을 지지 않는 존재로, 조선후기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06년의 향교 건물 보수와 신녕현 邑誌 改修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806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녕향교 大成殿의 風遮와 담장이 훼손되고 무너진 지 오래다. 祭器도 모두 파손되었으며, 西齋의 마룻대와 들보도 썩어 부러졌지만, 수리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1806년 봄, 官家에 청하여 願納 2명을 정한 뒤, 풍차와 담장을 우선적으로 수리했지만, 제기와 서재는 차차 重修하기로 했다. 그리고 祭器庫가 虛疎한 까닭에, 별도의 1庫를 典祀廳에 설치해 제기를 옮겼다. 또 1칸짜리 방을 수리하여 番儒가 宿直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때 新寧縣監朴南源이었으며, 齋任은 曹應稷·南瓚敬·成學仁이 맡고 있었다. 1806 가을에는 慶尙道監營에서 내려온 關文의 지시로 고을의 邑誌를 개수하였다. 당시 修正有司는 權正模가 맡았다.
한편 자료 말미에는 幼學 權以中李光洛의 監試 응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願納校生의 존재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원납교생은 향교에 재물을 납부하는 대신, 軍役을 면제 받는 부류였다. 당시 향교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관의 허락을 받아 원납교생을 확보해 나갔다. 원납교생은 양인들의 대표적인 避役 수단으로서, 軍額의 부족을 초래하여 사회·경제적 폐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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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聖殿風遮垣墻頹?已久祭器擧皆破傷西齋棟樑又爲腐折而末由修
葺之道矣丙寅春稟陳官家請得願納二名風遮與垣墻先爲修葺
祭器與西齋次次重修而祭器庫亦爲虛疏故典祠廳別設一庫移
案祭器又修一間房舍於其內使番儒留宿守直校宇隨處
修補焉主?朴南源
齋任曹應稷
曹瓚敬
成學仁
甲子式幼學權以中參監試初場
丙寅秋因營關改修正邑誌修正有司權正模
乙亥秋幼學李光洛參監試初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