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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81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781.4723-20150630.Y151050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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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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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781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81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781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먼저 1781신녕현감(新寧縣監) 주도로 백일장(白日場)을 개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고을 내 향교와 서원에서 재물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이어 훼손된 신녕향교 건물의 보수 공사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8월에 있었던 거센 비바람으로 인한 것이다. 특히 동무(東?) 건물이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신녕현감은 색리(色吏)를 파견해 공사를 감독케 하였다. 지방 관학(官學)인 향교가 어떤 형태로 관가(官家)의 관리를 받는 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81년의 白日場 개최와 향교 건물 보수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81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먼저 1781년 봄의 白日場 개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新寧縣監이 주도하여 連月로 백일장을 개최하였는데, 이때 三所에서 재물을 특별히 辦出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삼소 중 두 곳은 관내에 위치한 白鶴書院龜川書院이나, 나머지 한 곳은 자료의 결락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본 『고왕록』의 다른 기록을 감안한다면, 나머지 한 곳은 신녕향교일 가능성이 높다.
이어 수록된 신녕향교 건물 보수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同年 8월 초5일 거센 비바람으로 折木拔屋되었으니, 이는 전례 없는 哭變이다. 이로 인해 신녕향교 東?의 기왓장이 여기저기 날렸다. 특히 동무 東邊의 風遮 태반이 부러졌으며, 동무의 담장도 무너지고 훼손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이 大享 入齋日이어서 齋儒들이 매우 놀랐다. 이때 齋任 曹命鐸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동무 안으로 들어가 位版과 床卓을 옮기려 했는데, 갑자기 벽토가 바람에 떨어져 벽력같은 큰 소리가 났다. 위험한 상황에 재임의 놀람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에 수령은 下人을 시켜, 빈 섬으로 바깥을 막고, 안에는 두꺼운 종이를 발라 임시로 비바람을 막은 뒤, 齋를 거행하였다. 齋를 마친 후, 수령은 營門에 변고를 알리는 馳報를 올렸다. 당시 신녕현감趙器鎭이었으며, 신녕향교 都有司는 曹聖稷, 齋有司는 曹信敬, 掌議는 丁大運·조명탁이 맡고 있었다.
9월 13일, 香祝이 도착했으며, 21일 移安祭를 거행 한 후 보수 공사를 시작하였다. 官家에서는 黃鶴瑞를 色吏로 정해, 공사 감독을 맡겼다. 장인을 불러 매일 공사를 진행하여, 풍차·동무·담장, 그리고 벽을 수리하니, 같은 달 그믐에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동무 서변의 풍차도 노후한 상태였다. 새 것으로 보수한 동변 풍차와 미관상 너무 차이가 났다. 이에 거듭 관가에 청원하여 서변 풍차도 보수하니, 10월 10일 마무리되었다. 그 외 동무의 기와 공사를 6일에 걸쳐 진행하였고, 대성전의 문 1좌도 개조하였다. 전면의 벽토 또한 새로 칠했으며, 단청도 새롭게 하여, 10월 13일 還安祭를 거행했다. 그러나 훼손되었던 동재와 서재 기와는 재용의 부족으로 익년으로 미루었다. 이때 도유사는 曹相玉이었으며, 나머지 재임은 동일 인물이 맡고 있었다. 한편, 자료 중간과 말미에는 幼學 楊大源·曹龍績·曹學敬·朴基彦의 監試 응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교 운영의 실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가 조선시대 지방 官學을 대표하던 기관이었던 만큼, 수령의 관리 하에 각종 공사가 진행되었었다. 또한 興學에 관심을 가진 수령들은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백일장으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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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辛丑春主?設白日場又連月設場故自鄕中亦體官家之▣…
白鶴龜川三所辦出如干財物特設白日場而以紙束嘗給是亦一鄕之▣…
同年八月初五日風雨大作折木拔屋此乃振古所無之哭變聖殿東?瓦片
飄落碎地地者至於六百餘丈之多東邊風遮木太半破落東?墻壁頹破者
把風雨飄?殿內床卓是日乃大享入齋日也齋儒蒼黃失措罔無庇身地之于
斯時齋任曹命鐸觸風冒雨獨入殿內奉東?位版床卓而權移之時壁土迎風落地聲如
霹靂齋任驚怖?地其時爻象難以形言主?亦冒雨顚倒而入殿分付下人以空
石外遮以厚紙內塗至夜半風雨始止大享罷齋後主?以此意馳報營門
幼學楊大源參監試終場癸卯秋主?趙器鎭
參京試初場都有司曹聖稷齋有司曹信敬
幼學曹龍績參京試終場掌議丁大運
曹命鐸
九月十三日香祝來到二十一日移安于倫堂仍始役官家以黃鶴瑞定色吏招工
匠逐日董役東邊風遮及東?墻壁修葺之役垂畢於同月晦前而西邊

風遮亦多朽傷故有嫌於東西新舊之異累請於官家更始西邊之役垂畢
於十月初十日東西蓋瓦之役前後合六日殿門一坐亦爲折傷故改造前面壁
土亦頹落故盡爲改塗以沙土以白丹靑三色改?殿貌重新以十月十三日
卯時還安仍行祭禮倫堂東西齋蓋瓦亦多飄落而以日寒故未葺停役
幼學曹學敬參監試初場辛亥主?上同
幼學朴基彦都有司曹相玉
掌議上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