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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78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778.4723-20150630.Y151050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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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778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78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778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778년에 있었던 향교 건물 보수와 전답 매입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1778년 7월 거센 비바람이 때문에 신녕향교의 대성전(大成殿)과 동재(東齋)·서재(西齋) 건물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에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재용은 관의 지원, 유림들의 모금, 지역 인사의 기부 등으로 충당되었다. 12월에는 주막 터에 위치한 논을 매입하였다. 온천동(溫川洞)에 소재한 향교 보유 논을 방매하고, 그 돈에 제복전(祭服錢)을 보태어 매입한 것이다. 여기서 거두어들이는 지세(地稅)는 매년 시행되는 춘추(春秋) 향례(享禮) 비용으로 집행할 것임을 결의해 놓았다. 위의 사실은 조선후기 향교의 재정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78년의 향교 건물 보수와 田畓 매입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78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훼손된 향교 건물 보수와 田畓 매입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건물 보수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1778년 7월 24일, 사나운 바람과 괴상한 비가 내리니 전에 없던 바이다. 이로 인해 大成殿 東?의 壁土가 모두 떨어져 床卓 위에 쌓였고, 외벽의 벽토도 떨어졌으며, 기와 10여 편이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수령이 당일 奉審한 뒤, 營門에 馳報했는데, 급한 대로 안에는 두꺼운 종이를 발랐으며, 바깥에는 멍석을 덮어 비바람을 막았다. 10월 16일 香祝이 도착해, 11월 초2일 移安祭를 거행한 뒤,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도중 날씨가 추워 동무의 벽이 얼어 버렸다. 이에 관가에서 특별히 色吏 金百鍊을 파견해 공사를 책임지게 했다. 이때 김백련은 참숯을 많이 마련하였고, 또 철로 된 큰 화로 2좌를 구해 와서, 낮밤으로 불을 때서 벽을 녹였다. 11월 초3일에는 단청을 하고 대성전 문 위에 창호지를 발랐다. 이때 재용은 戶長 韓命大가 부담했으니, 매우 嘉尙하다. 공사가 마무리되어 11월 초4일에 還安하였으며, 11월 5일 告由하였다. 당시 新寧縣監徐邁修였으며, 齋任은 曹龍應·曹龍?·丁達運·楊大源이 맡고 있었다. 이에 앞서 그해 7월 東齋와 西齋가 기울어 수리했는데, 두 건물은 상황이 급해 鳩財하여 바로 改修했다고 한다.
이어 수록된 신녕향교의 전답 매입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1777년 1월 酒幕 터에 있는 논 16斗落只를 33냥에 매입하였는데, 매입비용은 溫川洞에 소재한 논을 팔고 받은 돈과 祭服錢 3냥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1778년 12월에는 주막 터에 있는 李奴 德三 處의 논 25斗落只를 60냥에 매입했다. 이때의 매입비용도 온천동 소재 논을 팔고 받은 45냥과 祭服錢 15냥으로 마련되었다. 이렇게 매입한 논은 結負로 44結 10負인데, 매년 얻을 수 있는 地稅가 44냥이다. 이를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22냥을 신녕향교의 春享과 秋享 때 비용으로 집행할 것이다. 당시 齋任은 조용응·曹亨國·金誠·丁慶運이 맡고 있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재정 운영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의 재정 기반으로는 전답·노비·儒錢·校保·校村·기부·관의 지원 등이 있었다. 본 자료에는 전답·유전·기부로 향교 재정이 충당되는 사례가 나타난다. 재해로 말미암은 공사는 갑작스레 재용이 필요한 사안이다. 이럴 경우 관의 지원을 받거나, 유림들의 鳩財, 기부 등으로 충당되기도 하였다. 또한 향교는 전답 소출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였으며, 전답 매임을 통해 재정을 증식하기도 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戊戌七月二十四日獰風怪雨振古所無?聖廟東?壁土盡落堆積牀卓外
築亦堆蓋瓦十餘片飄散【稻秀盡枯】兼官卽日奉審馳報營門而爲先以厚紙糊
移安祝曰瓦落雨漏修治宜速芬苾敬陳▣安
壁外遮草席以避風雨而十月十六日香祝來到十一月初二日移安仍爲施役而時當
是告還安祝曰蓋覆維新還奠永綬虔誠潔齋祗薦圭瓚
凍寒壁上生氷官家特令色吏金百鍊?役而多下白炭且收鐵大爐二晝夜連然炭
壁下初三日丹?殿門上窓戶紙戶長韓命大自當其意嘉尙初四日午時還安初五日
丑時告由主?徐邁修齋任曹龍應曹龍?丁達運楊大源
東西齋及門間?側迫在朝暮鳩材改修戊戌七月日邑?齋任上同
丁酉正月日酒幕基址宿字十五卜四-十六斗落只庫給價錢三十三兩而以溫川畓賣▣▣
得不足錢三兩以祭服錢三兩添補備給齋任上同
戊戌十二月日李奴德三處酒幕基址宿字十分田二十五卜三-十一田十一卜七-二作合三十七卜二十五斗落
只庫價折六十兩而以溫川畓賣錢四十五兩買得而不足錢十五兩則以祭服錢添給右兩庫地稅
錢結卜四結四十卜價收錢四十四兩內二十二兩春享用二十二兩秋享用折半分用於春秋享祀以爲永久▣…
之地齋任曹龍應曹亨國金誠丁慶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