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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77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777.4723-20150630.Y15105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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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777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77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777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777영조(英祖) 임금의 승하(昇遐)로 향교에서 행해지는 석채례(釋菜禮)가 궐례(闕禮)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 신녕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별판전답(別辦田畓)의 운영 방안 논의를 기록해 놓았는데, 별판전답은 지역 유림들이 장기적으로 신녕향교 이건(移建)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별판소(別辦所)의 전답이다. 관리가 부실하여 별판소의 재산이 궁핍해진 까닭에, 운영 개선 방안을 논의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77신녕향교의 釋菜禮 闕禮와 別辦田畓 운영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77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1777년의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1777년 8월에 있을 釋菜禮는 國喪 중이어서 闕禮하였다. 국상 중 향교의 제례는 練祭 전까지 闕禮한다는 규정을 따른 것이다. 이때 儒生들은 布衣·布帶·布笠을 착용하되, 練祭 후에는 白笠·白衣·白帶를 착용하게 했다. 또한 忌祭·墓祭와 같은 私家의 여러 제사도 因山 전까지 정지하며, 練祥祭 卒哭 이후에 거행케 하였다. 당시 국상은 이전 해에 있었던 英祖의 昇遐를 일컫는데, 영조의 諡號·廟號·殿號도 함께 기재되어 있다.
別辦田畓은 本所에 合屬시킨 후 마치 물에 물 탄 듯, 전혀 실효를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窮殘해졌다. 이는 별판을 창설한 처음의 뜻과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며 개탄하고 있다. 이에 향교 副任인 曹龍?·丁達運과 개선 방안을 상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別辦田畓 중 新積洞 畓 7斗落只, 孝旨山 畓 5斗落只, 朴命守가 향교에 기부한 溫川洞 畓 3斗落只, 이상 合 1石落只는 除出해서, 이를 校長이 맡아 소출되는 섬으로 田土를 매득해 증식하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한편, 자료 말미에는 『國朝五禮儀』에 수록된 "무릇 신명에게 제사하는 물건 중에서 그때 없는 것은 그때 있는 물건으로 대신하고, 外方에서는 또 토산물이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 채운다."라는 구절이 謄寫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향교 제례의 운영 실태와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신녕향교의 경제적 기반 중 하나인 別辦田畓의 窮殘이다. 본 『고왕록』의 1746년 기록에 따르면 지역 사족들이 錢穀을 모아 신녕향교에 別辦所를 창설했다고 한다. 이 별판소는 장기적으로 신녕향교 이건 비용 마련을 위해 창설되었었지만, 향교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경우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777년에 접어들어 別辦田畓이 매우 궁핍해졌던 것 같다. 궁핍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부실한 관리가 원인인 듯하다. 별판소의 자금은 지역 사족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마련되었다. 향교는 지방 官學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시대 재지사족의 자치기구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별판전답과 같은 사족들의 기금도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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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八月
文宣王釋菜以國哀未葬前闕禮外學宮則練祭前闕禮▣▣
服制布衣帶布笠?網巾練祭後白笠白布衣帶?私家停祭
因山前忌祭墓祭練祥祭卒哭後許行
大行大王諡號翼文宣武熙敬顯孝?廟號英宗?殿號孝明殿?
陵號元陵
別辦田畓合屬本所之後如水入水少無實效而窮殘益甚昔年?設
別辦之意果安在哉不勝慨然與副任曹龍?丁達運相議而除出別辦畓
新積洞畓七斗落只孝旨山畓五斗落只及朴命守付校畓溫川洞畓三斗
落只合一石落只付於校長年年執禾便利買得田土則庶幾有補於將來

凡祭神之初當時所無以時物代之外方則又非土産以其類代之【五禮儀謄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