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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56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756.4723-20150630.Y151050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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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756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56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756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756년에 있었던 주요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1756년 3월, 신녕현에서 여제(?祭)를 지내는 여단(?壇) 이건(移建) 터를 새로 점지했음이 나타난다. 이어 8월에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묘(文廟) 배향에 따라, 신녕향교에도 두 사람의 위패를 봉안(奉安)하게 되었는데, 본 자료에는 그 과정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달 신녕향교 전사청(典祀廳)의 보수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위패를 봉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전사청 보수비용을 관청에서 지원해 준 사실이 주목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56년의 厲壇 이건 터 占得, 宋時烈·宋浚吉 문묘 배향, 典祀廳 修補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56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먼저 1756년 3월에 있었던 ?壇 移建 터를 占得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鳴溪祠 齋會에서 鄕首인 楊益三權達徵鳴泉洞 큰 보 위, 길이 1貫의 밭을 이건 터로 점지했던 것이다. 다음에는 그 해 8월, 文廟에 배향된 宋時烈宋浚吉의 위판을 신녕향교에 奉安하는 과정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 위판의 나무는 營門에서 각 고을에 나누어 보냈고, 신녕현에서는 禮吏, 신녕향교에서는 儒生을 보내 香祝과 位版을 모셔왔다고 한다. 향축과 위판을 모셔오는 비용, 즉 馬稅는 大同稅에서 지출되었다. 그리고 東?의 題板은 丁熙運, 西?의 題板은 曹振玉이 각각 담당하였다. 문묘 배향 때 국왕이 올린 告由祝文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기록은 같은 달에 있었던, 典祀廳 修補 사실이다. 修補에 祭器鍮鐵 42근 10냥, 돈으로 33냥 3전이 필요하였는데, 이 중 10냥은 관에서 내려준 大同米 1石 8斗를 作錢해서 마련하였고, 나머지 23냥 3전은 향교 願納錢에서 충당하였다. 당시 新寧縣監李守鎭이었으며, 신녕향교 都有司는 曹龍天, 掌議는 權弘運丁熙運, 齋有司는 楊柱漢이었다. 자료 말미에는 幼學 曹鵬海의 監試 응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경제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향교는 전답과 노비를 기본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었으나, 官學이었던만큼 관청의 지원을 수시로 받았다. 본 자료에서는 관에서 大同稅를 지원 받은 것이 주목된다. 지방의 각 관아는 중앙에 대동세를 납부한 후, 남은 것을 儲置하여 지방 재정으로 충당하였었다. 지방 관아의 대동세 지출 항목으로 馬稅와 향교 修補 비용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전사청 수보 때 원납전이 확인되는데, 이는 향교에 投託한 이들이 납부한 돈을 뜻한다. 이들은 주로 避役을 목적으로 하는 양민이었다. 額外校生 또는 校保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원납전 역시 조선후기 향교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丙子三月初日因鳴溪祠齋會與鄕首楊益三權達徵占得?壇
新基之址於鳴泉洞大洑上張一貫之田以爲移壇之計
同年八月初日丁酉陞配尤菴同春堂兩先生於東西?而位板木則自
營門分送各邑而自官送禮吏自校送儒生陪來香祝及位板而馮稅

則自大同▣上下題板東?丁熙運西?曹振玉
告由祝因享禮告由
年月朔朝鮮國王謹遣臣敢昭告于
先聖大成至聖文宣王伏以道冠百王萬世之師玆値丁上精?是宜天佑
大東群儒蔚興統承先聖大法是弘維此兩賢學得其宗剛健篤
實道全德隆春秋大義考亭正?繼開之功百世不惑陞祀聖?吾
道增崇爰及州庠享祀咸通玆因釋采將擧縟禮先事告由陳此牲
幣謹以牲幣醴齊?盛庶品式陳明薦以先師
禮成祝同日行祀
年月日朝鮮國王謹遣臣敢昭告于
先聖大成至聖文宣王伏以兩賢?享斯文在玆縟儀旣成設陳醴?
謹以醴?庶品式陳明薦以先師配幣帛不用

祭器鍮鐵四十二斤十兩每斤鐵五?式自官買價而鐵價二十一兩三?▣
價及鐵釘粉柒合十二兩合錢三十三兩三?內十兩以大同米一石八斗作錢計▣
二十三兩三?以本校願納錢添給八月日修補典祀廳次定色吏伐木▣▣
主?李守鎭都有司曹龍天掌議權弘運丁熙運齋有司
幼學曹鵬海參監試終場
楊柱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