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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44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1744.4723-20150630.Y15105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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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신녕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작성시기 1744
형태사항 크기: 28 X 19
수량: 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신녕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 『고왕록(考往錄)』 수록 1744년 기록
경상도(慶尙道) 신녕현(新寧縣) 신녕향교(新寧鄕校)고왕록(考往錄)』의 1744년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기록된 것인데, 1744년 이전 기록은 흩어져 있는 유문(遺文)과 간략한 사적만 정리해서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에는 1744년에 있었던 제복(祭服)과 대성전(大成殿) 보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7월에는 향교의 제복을 새롭게 마련하였는데, 이때 자금은 예전(禮錢)에서 충당되었다. 예전은 향교에 처음 입학하는 학생들이 납부하는 돈으로, 조선후기 향교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 중 하나였다. 또 같은 달 거센 바람과 큰 비로 향교 대성전이 훼손되었으나 향사(享祀)가 가까워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두꺼운 종이를 벽에 칠하였으며 멍석으로 바람을 막았다고 한다. 10월에 대성전 보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는 관청의 협조를 받아 부이방(副吏房) 이재빈(李載彬) 주도 하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또한 같은 달, 성주(星州)의 지관(地官) 박세침(朴世琛)이 와서 향교 이건을 계획 중인 새 터를 살펴보았으며, 좋은 터임을 확인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풍수설에 의한 향교 이건은 나라에서 금지하는 바라고 하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44년의 향교 祭服과 大成殿 보수 기록
考往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新寧縣 新寧鄕校考往錄』에 수록된 1744년의 기록이다. 신녕향교고왕록』은 1744년부터 1914년 고을이 慶尙北道 永川郡에 편입될 때까지 작성되었다. 다만 1744년 이전의 향교 이력은 종전의 『고왕록』이 유실된 까닭에, 당시까지 남겨져 있던 각종 遺文과 간략한 사적만을 수록해 놓았다.
본 자료는 1744년에 있었던 祭服 및 大成殿 보수 기록이다. 먼저 1744년 7월 신녕향교의 祭服이 파손되었으나, 物力의 부족으로 새로 마련하지 못해 士林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享祀하는 날 官家에서 이런 상황을 살펴 본 뒤 향교 齋儒들과 보수 방안을 논의하였는데, 童蒙으로 향교에 들어오는 자들이 납부하는 禮錢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禮錢에 정액이 없어 납부의 多少가 일정하지 않기에, 많이 납부하는 액수에 맞추어 적게 납부한 자들한테 추가 징수하여, 보수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祭服과 祭冠 5건이 새로 마련되었고, 훼손된 祭器도 수리할 수 있었다.
이어 7월 27일에는 대성전 보수가 이루어졌는데, 앞서 7월 8일 거센 바람과 큰 비로 대성전 東? 벽토가 모두 떨어져 牀卓 위에 쌓였고, 동쪽 구성 모퉁이가 기울어 기와 70여 편이 담장 안팎으로 날렸다고 한다. 이에 官家에서 살펴 본 후 營門에 馳報한 뒤, 보수를 허락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享祀가 가까워 바로 공사를 하지는 못하였다. 임시방편으로 두꺼운 종이를 벽에 칠하였으며, 멍석으로 바깥바람을 막는 조취를 취한 것이다. 그러면서 신녕향교가 영남에서 還安과 移安을 가장 많이 했다며, 비바람에 의한 피해로 잦은 공사가 시행됨을 한탄하고 있다. 이어 9월 20일에 香祝이 來到하였으며, 10월 16일 移安 후 보수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파 때문에 새롭게 칠한 壁土가 얼어버려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자 官家에서 副吏房 李載彬을 보내 공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재빈은 우선 埋炭을 많이 갖춘 후, 고을 내에 있는 鐵火爐를 거두어들였다. 이를 대성전 各壁 아래에 설치하여 밤과 낮으로 불을 지펴 얼어버린 벽토를 녹인 것이다. 9월 21일에는 단청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단청은 門上의 窓戶紙와 함께 이재빈이 自當한 것이다. 9월 22일 還安이 거행되었는데, 이때의 還安祝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당시 新寧縣監金元澤이었으며, 齋任은 丁萬齊 외 3명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幼學 정만제 외 2명이 監試에, 金達恒이 東堂에, 權得龍이 覆試에 응시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자료 말미에는 10월 星州의 地師 朴世琛이 고을 下館 뒤 西向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는 신녕향교 측에서 이전부터 준비 중이던 향교 이건 자리였다. 박세침을 통해 좋은 자리임을 확인받았으나 堪輿說, 즉 風水에 의거한 향교 이건은 나라에서 금지하는 바이기에, 이건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禮錢의 납부 실태는 향교마다 다르나, 신녕향교의 경우 童蒙, 즉 入學者들이 납부하는 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규정한 별도의 액수가 없으나, 이런 禮錢의 收納은 향교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본 자료에서 주목할 점은 향교 보수에 있어, 官家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조선후기 향교가 재지사족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으나, 향교가 지방 官學을 대표하는 만큼 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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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甲子七月日
本校祭服破壞有駭瞻視而物力難辦爲士林之所慨恨者難
矣官家於享祀之日看審模樣與齋儒謀所以新之咸
曰童蒙之付校者各有禮錢而多少不均査出其少者加捧

而以準其多持之數則實爲均平而足當改備之數云▣▣
出校案加捧禮錢以備祭服冠事五件及祭器之破缺者
且補各壇祭服而下記則在別所文書中
同月二十七日八日狂風自東北起大雨飜盆聖殿東
?壁土盡落堆積牀卓外等亦頹東隅蓋瓦七十餘片飄落
於墻內墻外官家奉審後馳報營門而享祀迫頭以厚紙
糊壁以草席遮外以避風雨而風雨之變振古所無有嶺南
爲最列邑移還安無數云
九月二十日香祝來到以十月十六日移安後施役而時當凍
寒新塗壁土生氷官家持令副吏房李載彬檢役而多備
埋炭且收聚邑中鐵火爐四晝夜燃炭於各壁下二十一日
暮始爲丹?丹?各采及殿門上窓戶紙李載彬自當二十二日還


瓦飄以落殿漏于雨玆告權安?緩修補移安祝風字卽瓦字
修葺旣訖涓吉奉還有?實枚孔肅且安還安祝
主?金元澤齋任丁萬齊楊義培曹龍慶丁致大
幼學丁萬齊
曹龍慶參監試初場甲子春同榜
楊德培
金達恒參東堂
權得範參覆試同年
十月日適逢星州地師朴世琛省審下?後西向之基則以名基稱之此地累經堪
輿之眼而有譽無毁更俟後之神眼宜決定而爲防禁所?是可恨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