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의 내용
慶尙北道 慶山郡 소재 河陽鄕校의 1920년과 1923년 향교 重修 기록이다. 향교 건물의 공사 일지, 당시의 諸執事 명단, 祭禮 때 사용된 祭物, 공사 때의 扶助者 명단과 부조 금액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자료 가장 서두에는 1920년 향교 중수를 협의하게 된 경위, 그리고 중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 배경을 언급해 놓았다. 먼저 지난 1920년 2월 上丁日, 즉 上皇이었던 高宗의 大祥 전에 釋奠禮를 행한 뒤 聖殿, 神門, 明倫堂, 耆老所, 西齋를 奉審하였는데, 비가 새고 들보가 꺾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重修를 논의하였으나 지난 1822년에 향교를 중수할 때에는 儒會에서 官에 稟處하였고, 官은 다시 營門에 보고하였으며, 營門은 조정에 啓聞하여 재가를 받아 중수를 하니 질서 정연한 법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고을이 폐지되고 위로는 의지할 곳이 없으며 아래로는 措劃할 처지가 되지 못하는 사정임을 개탄하였다. 1822년 하양향교는 대규모 중수를 하였는데, 이때의 기록은 하양향교에 전하고 있는 1822년 「聖廟重修時記略」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1822년 하양향교는 河陽縣에 소재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慶山郡에 통합되어, 1822년 때처럼 지방관의 특별한 관심으로 정부에 지원을 요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역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었는데, 각 문중별로 거두어들여 若干의 자금을 모아 하양향교 중수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때에 京城에서는 大東斯文會가 各道 各郡에 위치한 향교의 재산 환원을 논의하니, 본 향교에서도 校首를 파견하여 회의에 참석했음을 밝혀 놓았다. 지역 유림들의 자금 모금과 대동사문회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향교 중수가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7월 초의 吉日을 택해 10월 말에 이르기까지 향교 중수가 이루어졌고, 지난 1822년에 만들어진 「聖廟重修時記略」의 예에 따라, 중수 과정을 기록하게 되었다며, 자료의 작성 경위도 함께 밝혀 놓았다. 이때의 典司는 金厚潤을 포함해 모두 9명이며, 都有司는 曺學璣, 掌議는 金后浩와 朴景春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음에는 1920년의 중수 과정을 날짜별로 간략히 정리해 놓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대성전에 모셔진 위패를 명륜당으로 옮기는 移安祭가 7월 4일 上丁日에 있었으며, 전날 저녁부터 이안제 준비 작업이 있었다. 校任이 祭物을 가지고 諸執事와 獻官이 神門에서 祗迎한 것을 시작으로 香祝, 陳設, 望燎 등의 제례 절차를 행하였다. 巳時에 告由를 하였으며, 幼學 曺學璣가 祝文을 올렸다. 조학기는 이전에 하양향교 도유사를 역임했던 인물로 당시 校長의 직분이었다. 축문에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각 향교 건물에 비가 새고 퇴락하여 孔子, 顔子, 曾子, 子思, 孟子 5聖의 위패를 옮기게 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이어 제례에 참여한 獻官과 諸執事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는데 獻官은 조학기를 비롯하여 許極, 崔鳳漢, 都瑀成, 全錫奎로 나타난다. 이때의 諸執事로는 執禮, 大祝, 奉香, 奉爐, 東廡奉香과 奉爐, 西廡奉香과 奉爐, 典祀官, 謁者, 贊人, 司尊, 判陳設이 있었으며, 당시 장의였던 金后浩와 朴景春은 각각 奉香과 奉爐를 맡았다. 헌관과 집사 명단 다음에는 移安祭에 올려진 祭物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마친 후에는 헌관이었던 교장이 공자의 신위 앞에 나아가 鞠躬하고 噫歆한 뒤 신위와 器物을 명륜당으로 옮겨 北壁에 奉安하였다고 한다.
7월 5일 대성전의 벽을 부수었는데, 이때의 役丁은 하양향교가 위치한 校洞의 주민을 차례대로 調用한 것이다. 7월 6일 대성전의 기와를 철거하였고, 7월 8일 대성전의 기둥 修正은 인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에 형틀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지탱하였다. 7월 10일 大邱에 工人을 보내 대성전의 도리목으로 사용할 나무를 구매해 왔다. 7월 12일 올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7월 13일 서까래를 고쳤는데, 연목은 慶山 松下里 呂斯文의 집에서 가져왔다. 7월 14일 처마의 桴椽을 고쳤는데, 서까래로 쓰고 남은 것을 調用하였다. 7월 15일 동변의 耨椌을 고쳤는데, 대구에서 구입해온 나무를 사용한 것이다. 7월 16일 동변의 風板, 앞 처마의 正間 서까래와 뒤 처마의 東北間 서까래를 고쳤다. 7월 17일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기와의 堅實함은 새것이 옛 것 같지 못한 까닭에 神門을 덮고 있는 것을 철거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7월 18일 土工을 시작하였는데, 대성전 안의 도배와 裹簟은 미장이가 보수하였다. 7월 20일 대성전 안의 土廳을 보수하였다. 읍내의 役丁으로 하여금 錦江의 栗石을 가져오게 하였고, 역정 중 견실한 자를 뽑아 石灰를 계단과 伏壁에 발랐다. 7월 21일 白土를 발랐는데, 석회와 백토는 대구 西門의 가게에서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대성전 내벽과 외벽의 虧欠한 곳에 仰土하였다. 7월 23일 옛 簟은 바람에 마모되어, 안에 비가 새는 까닭에 새로 裹簟하였다. 7월 24일 대성전에 丹靑을 하였고, 대성전 편액 세 글자를 改粉하였다. 7월 25일 대성전의 板門 세 쌍을 걸었고, 옛 문의 세 쌍은 東庫門에 걸었다. 7월 26일 三階를 改築하였는데, 동쪽과 서쪽의 계단은 옛 것을 그대로 정리하였다. 7월 27일 神門을 정비하였으며, 바로 앞의 뒷기둥의 도리목과 서까래를 고쳤다. 7월 28일 庫室에 덮어 놓은 것으로 기와를 이었다. 7월 29일 미장이가 仰土를 발랐고, 役丁이 앞 계단에 백토를 발랐다. 7월 30일 神門에 단청을 하였다. 8월 1일 役丁으로 하여금 琴樂洞 前川의 모래와 돌을 가져오게 해서, 대성전 앞뒤 마당을 메웠다. 8월 2일 席子를 고쳤다.
약 한 달에 걸친 공사 끝에 8월 3일 午時, 위패가 대성전으로 還安되었다. 전날 저녁 교임이 奠物을 처음과 같이 迎侯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還安祭도 移安祭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告由는 未時에 행해졌다고 하며, 이때의 獻官과 諸執事의 명단, 祝文의 대략, 이때 올려진 祭物을 수록해 놓았다. 헌관은 조학기를 비롯하여 崔泳, 黃仁祚, 허갑, 朴寅羲 5명이며, 移安祭와 마찬가지로 祭執事는 執禮, 大祝, 奉香, 奉爐, 東廡奉香과 奉爐, 西廡奉香과 奉爐, 典祀, 謁者, 贊人, 司尊, 判陳設이 임명되었다.
대성전의 수리와 위패 還安이 끝난 후에는 나머지 건물들에 대한 중수 공사가 시작되었다. 8월 6일부터 耆老所 공사를 시작하였다. 처마와 서까래, 欂椌, 廳板을 수리하였다. 聽門도 새로 만들었으며, 미장이가 백토를 새로 발랐다. 瓦工은 빈 곳의 기와를 덮었다. 8월 10일 西齋 공사를 시작하였다. 북변 層間과 庫室을 고치고 後西門을 새로 만들었다. 백토를 바르고 기와를 덮었으며, 夾門도 새로 만들었다. 9월 2일 明倫堂 공사를 시작하였다. 西上房의 長門 한 쌍을 새로 만들었고, 미장이가 서남쪽 벽에다 백토를 발랐다. 앞 계단을 개축하였고, 虧缺된 곳에 기와를 새로 이었다. 명륜당의 편액 세 글자도 改粉하였다. 9월 3일 이미 무너진 庫室 세 칸을 헐고, 남은 기와는 神門에 사용하였으며, 남은 杇木은 外三門의 散子에 補用하였다. 9월 4일 脯舍의 앞문과 下堂의 대문을 새로 만들었다. 9월 7일 외삼문의 礎石을 새로 세웠다. 이때 體木은 汗沙洞 崔斯文의 집에서, 椽木은 琴樂洞의 李長榮의 집에서 가져왔다. 9월 14일 立柱 上樑하였다. 9월 18일 기와를 이었는데, 기와는 대구에서 구매한 것이다. 9월 25일 미장이로 하여금 仰土를 바르게 했다. 9월 28일 外大門 세 쌍을 새로 만들어 걸었다. 10월 1일 향교의 담장을 개축하였다. 담장 앞에는 향교 案山에서 가져온 소나무 가지를 골고루 덮었다. 삼문 앞의 香木은 뿌리가 노출되어 얼마 되지 않아 썩을 수 있는 까닭에, 南面의 役丁으로 하여금 돌을 옮겨오게 해서 덮었다. 1920년의 하양향교 중수 공사 기록 말미에는 총 공사기간이 6월 26일부터 10월 1일까지이고, 落成式 때 講筵과 鄕飮禮를 개최하였으며, 이때의 都有司는 조학기, 장의는 김후호와 박경춘, 別有司는 黃章遠이라고 기재해 놓았다.
이어 1923년의 중수 공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1923년 공사가 시작되는 경위를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지난 1920년 대성전 공사 때 미처 준공하지 못한 庫子室이 기울어져 무너지고, 庖舍는 헐어버려 一鄕의 사림들이 모두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에는 모금한 자금이 부족하여 重建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교임이 郡으로부터 2,000金에 달하는 자금을 얻어와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며, 공사 경위의 대략을 언급해 놓았다. 1923년의 중수 공사 기록도 1920년의 기록과 같은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庫子室 공사 기록을 수록해 놓았다. 2월 9일 교동의 인부를 役丁으로 調用하여 庫子室을 무너뜨렸다. 2월 21일 西沙洞의 인부를 役丁으로 調用하여 列礎하였다. 2월 24일 立柱 上樑하였는데, 體木은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3월 5일 기와를 이었다. 부족한 기와는 변소 기와에서 보충해서 썼다. 3월 7일 土工을 시작하였다. 흙은 瓦村面의 인부를 役丁으로 調用해서 가져온 것이다. 3월 25일 沙土를 발랐는데, 珍良面의 인부를 役丁으로 調用하였다. 이어 庖舍 공사 기록을 수록하였는데, 3월 8일 처음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3월 25일 列礎하였고, 3월 28일 立柱 上樑하였다. 體木은 교동 池內의 버드나무를 구입해서 사용한 것이다. 4월 1일 와촌면 江谷에서 사온 서까래를 걸었다. 4월 5일 藁草를 덮어 지붕을 엮었다. 4월 10일 土工을 시작하였으며, 房門 여섯 쌍과 명륜당 直員室門 두 쌍을 걸고, 변소를 신축한 사실을 끝으로 1923년의 중수 공사 기록을 마무리해 놓았다. 이때의 하양향교 교임은 直員 박경춘, 장의 曺鎭煥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役丁記’라 하여 진량면에서 150명, 하양면에서 150명, 와촌면에서의 150명 인부 동원 사실을 기재하였다.
본 자료의 말미에는 1920년 10월 27일 기록된 ‘校宮重修時各門中補助錄’을 수록해 놓았다. ‘校宮重修時各門中補助錄’은 해당 문중의 성씨, 보조한 사람의 성명, 보조한 금액, 거주지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모두 65개 문중에서 9,750냥을 보조하였는데, 62개 문중이 150냥, 2개 문중이 200냥, 1개 문중이 50냥을 보조하였다. ‘校宮重修時各門中補助錄’ 말미에는 ‘補助寄附記’라 하여 개인적으로 보조한 3명의 성명과 보조한 금액, 거주지를 기재해 놓았다. 이들이 보조한 액수는 모두 60냥이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향교의 재정적 기반으로는 전답과 노비, 校村, 校保, 官의 지원, 유림의 기부 등이 있었다. 각 향교는 향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官과의 협조 또는 묵인 하에 향교 재정을 확충해 나갔었다. 그러나 韓末에 이르러 정부가 근대식 교육기관의 재정으로 향교 재정을 전용함으로써, 향교 운영은 크게 피폐해져 갔다. 아울러 사회질서의 변동에 따라 지역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향교의 기능과 권위도 크게 위축됨으로써, 유림들의 관심도 종전보다 약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장 먼저 향교 건물의 퇴락으로 나타났다. 1920년 당시 하양향교 건물도 퇴락하였지만, 재정의 부족으로 오랫동안 건물 중수를 하지 못하였다. 자료 서두에는 고을의 통폐합으로 예전처럼 啓聞을 통해 官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음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향교 운영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하양향교는 지역 유림들의 기부로 건물 중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 官으로부터의 지원이 사실상 끊긴 상황에서 유림들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향교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20년은 친일 유림 단체였던 大東斯文會가 朝鮮總督府 總督에게 향교 재산의 환원을 요구했던 해로, 본문에는 대동사문회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하양향교의 건물 중수가 시도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유림들에 대한 일제의 통제 정책과 연관지어 살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大東斯文會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