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1847)년 정월 5일을 시작으로 경인(1890)년 9월 12일까지 총 47차례 추입사항을 기록한 풍기지역 입사록
자료의 내용
정미년(1847) 정월 5일부터 경인년(1890) 9월 12일까지 풍기지역으로 入社한 인물을 나이순으로 기록한 입사록으로 대부분의 인물들이 작성당시 사망한 것으로 보아 작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최초로 작성된 정미년의 기록에는 68명의 이름과 출생년, 字가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풍기향교 소장 여타의 자료와의 인적구성의 비교를 통해 정미년이 1847년임을 알 수 있다. 1847년을 시작으로 총 47차례에 걸쳐 수십명에서 적게는 2~3명이 계속 추입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입사록이라는 제목에 보이는 것과 같이 본 문서는 향교에 입록하는 교안과는 약간 다른 성격의 문서로 풍기지역으로 유입되어 향촌자치사회로 편입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입사록에 기록된 인물들의 일면과 비슷한 시기에 작성되었거나 중첩되는 시기에 작성된 여타의 교안 및 향안을 비교해보면, 향교의 학생들의 명부인 교안과 중첩되는 인물들보다 누락되는 인물들이 더 많이 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향안의 그것과는 비교적 많은 수가 상통하는 것을 통해서 단순히 학생들의 명부를 문서의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떠한 기준점으로 기재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풍기 및 은풍지역을 견인하는 사족계층인 黃, 李, 權, 朴, 金, 安 등 일찍부터 유향소를 조직하여 향촌질서를 주도하였던 이들이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어 향촌지배 성씨와 일맥상통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본 문서 《입사록》은 여타의 지역에서 쉽게 보여지지 않는 제목의 문서로 향안의 그것과 양식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아 성격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나 어떠한 모임의 성격과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는지는 부기된 사항이 없어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풍기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풍기지역의 지배사족의 양상과 향권 주도 세력의 변화를 파악하는데 유용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의 鄕村社會는 상당히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때문에 무엇이든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지배신분층의 존재형태, 즉 士族層이 자기 이익을 고수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였는가 아닌가에 따라 또는 반대로 사회 전반적인 변화에 편승한 새로운 세력이 지배층과 대항할 만큼 성장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대체로 士族의 기반이 강한 嶺南地域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상대적으로 미약한 실정이었다. 본 문서에서 드러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띄고 있는 것으로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풍기지역을 주도하는 성씨계층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정미년(1847)에 68명을 시작으로, 무신년(1848)에 68명, 기유년(1849) 60명, 계축년(1853) 9명, 갑인년(1854) 27명, 을묘년(1855) 3명, 병진년(1856) 3명, 정사년(1857) 3명, 무오년(1858) 8명, 경신년(1860) 4명, 임술년(1862) 1명, 갑자년(1864) 35명, 병인년(1866) 4명, 정묘년(1867) 20명, 무진년(1868) 4명, 경오년(1870) 13명, 임신년(1872) 3명, 계유년(1873) 11명, 갑술년(1874) 2명, 을해년(1875) 3명, 병자년(1876) 16명, 정축년(1877) 20명, 무인년(1878) 1명, 경진년(1880) 15명, 신사년(1881) 7명, 임오년(1882) 3명, 을유년(1885) 10명, 병술년(1886) 13명, 정해년(1887) 3명, 무자년(1888) 4명, 기축년(1889) 3명, 경인년(1890) 8명 총 48차례에 걸쳐 추록되어 있다.
본 문서의 작성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完議 및 鄕規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운영과 입록 방식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나 일반적인 향원 입록 기준은 세습과 신분이라는 기준에 의거하였으므로 신분상 하자가 없어야 되고, 기존 입록자의 자손으로 자격을 제한하는 보통의 그것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록자가 나이 순서로 차례대로 되어 있지만, 대표적 성씨인 황, 이, 박, 김 등 이름과 자호에 있어 유사함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혈연적 관계가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향안 및 풍기지역의 기타 향촌사회 운영에 관한 문서에 드러나는 중첩되는 여러 인물들로 반증된다고 하겠다.
풍기의 향촌질서를 재편한 황, 곽, 한, 이, 권, 박, 김, 안 하 등의 성씨는 일찍부터 유향소를 조직하여 土姓吏族을 대신하여 향촌질서를 재편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풍기에서 작성된 각종 향안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문서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황씨와 이씨를 중심으로 김씨, 안씨, 박시, 권씨 등은 일찍부터 풍기지역을 지배하던 토성과 이주한 성씨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본 문서는 여타의 지역에서 쉽게 보여지지 않는 제목의 문서로 향안의 그것과 양식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아 성격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나 어떠한 모임의 성격과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는지는 부기된 사항이 없어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풍기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문서와의 비교를 통해 풍기지역의 지배사족의 양상과 향권 주도 세력의 변화를 파악하는데 유용하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사족의 기반이 강한 영남지역에서의 19세기 중엽 이후에도 풍기지역을 주도하는 성씨계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조선후기 향촌 양반사회의 지속성과 변화상 (2)-安東鄕案의 入錄인물 검토」『대동문화연구』38, 鄭震英, 성균관대학교, 2001
「鄕規硏究」『韓國史硏究』54, 金龍德, 한국사연구회, 1986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