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부터 1864년까지 慶尙道 長鬐縣에 위치했었던 竹林書院 방문 인사들의 방명록
竹林書院尋院錄
자료의 내용
1792년부터 1864년까지 慶尙道 長鬐縣에 위치했었던 竹林書院 방문 인사들의 방명록으로, 표제는 ‘竹林書院尋院錄’이다. 방문 인사들의 거주지가 전부 확인되지는 않지만, 장기현 내 인사들 보다는 다른 지역 출신 방문자 위주로 수록되어 있다. 죽림서원은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 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본 자료는 長鬐鄕校에 소장되어 있는데, 훼철 이후 향교에 이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심원록은 ‘壬子 閏四月 日’부터 甲子年의 ‘三月 十七日’까지 기재되어 있다. 가장 앞에 수록된 인사가 ‘壬子 閏四月 初七日’에 瞻謁한 縣監 李天晟인데, 이천성의 장기현감 除授가 1792년 4월인 것으로 보아 최초 작성연대는 1792년이며, 1864년까지 작성된 심원록임을 알 수 있다. 기재 방식은 일정하지 않다. 주로 성명과 본관, 그리고 방문 날짜를 기록해 놓았는데, 자신의 字와 출생 干支, 거주지, 숙박 여부, 瞻謁의 시간, 인솔한 奴와 馬의 숫자, 瞻謁의 동기, 역임한 관직을 기재한 경우도 있다.
심원록에 수록된 인사의 명부 작성 회수는 자료에 결락이 있어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246회로 추정된다. 이 중 세 군데는 자료의 결락으로 이름이 확인되지 않으며, 한 군데는 의도적으로 이름을 말소한 것이다. 확인되지 않는 네 군데를 제외하고 242회의 방문 기록을 살펴보면, 2회 이상 방문한 자도 다수 발견되는데, 이들의 중복 방문 기록을 제외하면 모두 209명이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들의 姓貫은 매우 다양하다. 확인되는 성관만 77개인데, 이중 安東權氏 10명, 慶州金氏 8명, 星州李氏 7명, 盆城金氏 6명, 義城金氏 6명, 安東金氏 6명, 仁同張氏 6명, 缶林洪氏 6명, 永川崔氏 5명으로 이들 성관의 방문 비중이 다소 높을 뿐이다. 이는 죽림서원에 타 지역 출신의 방문 인사가 많았음을 반증한다. 실재 심원록에 수록된 인사들 가운데 거주지를 기재한 인사를 살펴보면, 배향자 宋時烈의 고향인 懷德 출신의 인사를 비롯하여 漢陽, 忠州, 洪州, 廣州 등 他道 출신 인사가 확인되며, 道內 인사로는 安東, 義城, 高靈, 漆谷, 順興, 永川, 星州, 陜川, 義興, 寧海, 新寧, 慶州, 大邱, 興海, 淸河, 草溪, 迎日, 密陽 등의 인사가 방문하였다.
현감의 신분으로 방문한 인사는 모두 9명이다. 심원록 가장 앞에 수록된 이천성도 장기현감의 신분으로 방문하였는데,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배향한 관계로 수령들의 관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심원록의 작성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심원록 작성은 전반부, 특히 1830년대에 집중되어 있지만, 1840년대 이후 방명록을 기재한 인물은 단 5명만 확인될 뿐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黨色에 따른 서원의 사회적 기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원래 서원은 교육과 교화의 목적으로 지방에 설립된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당쟁의 심화로 각 붕당은 여론의 결집과 지지 세력의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서원을 건립하였고, 이것은 서원의 濫設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가운데 노론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였지만, 영남 1도 만큼은 南人係의 위세가 강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 세력은 영남에 노론 세력을 부식하고 남인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방책으로, 비주류였던 영남의 노론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노론계 서원의 건립이었다. 주요 남인계 가문이 없었던 장기현은 조선시대 유명한 귀양지로 禮訟論爭의 패배로 송시열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런 연고를 바탕으로 장기현에 죽림서원이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이며, 죽림서원에 대한 노론계 인사들의 관심도 남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심원록에는 적지 않은 수령의 방문, 한양을 비롯한 畿湖 지방 노론계 인사들의 방문 사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竹林書院은 1707년 시공되어 이듬해 완공된 서원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건립되었었다. 배향자 宋時烈은 1675년 長鬐縣으로 유배를 왔고, 그의 학통에 영향을 받은 지역 유림들이 鄕論을 모아 건립한 서원이다. 처음에는 송시열의 影幀을 봉안한 祠宇로 출발하였다. 경상도의 중요한 老論係 서원이었으나, 1871년 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복구되지 않았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書院硏究』, 李樹煥, 一潮閣,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