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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G.1761.4717-20140630.Y142170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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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예안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61
형태사항 크기: 30 X 24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현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61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본 자료는 1761년 8월 예안향교에서 작성된 교안이다. 교안은 일종의 학생명부로 입록인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신분에 따른 것으로 완의의 규정 및 향안과의 비교를 통해 액내와 별유는 양반사족으로, 액외와 교생은 중서층 및 상민층이 입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안향교 생도의 분화는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은 점이다. 청금록은 향교를 출입하였던 양반사족들만의 명부로 조선후기 대부분의 지역에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이러한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고 양반사족들은 기존의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였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별유로 옮겨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일반 양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향교진출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양반사족들이 교안이 작성된 조선후기까지 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1761예안향교의 생도를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1761禮安鄕校에서 작성된 校案이다. 교안은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학생명부이다. 예안향교에는 1620년부터 1776년까지의 교안 54건이 현전하고 있으며 본 자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예안향교 교안의 작성주기는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2월 또는 8월 작성되었다. 그리고 생도를 종류별로 구분하고 성명을 기록하였으며 하단에는 입록인의 신상관련 사항을 기록, 마지막에 守令의 手決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자료 또한 秋, 8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지며, 교안 입록인들은 額內, 別儒, 額外, 校生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그리고 입록인의 이름 하단에 在喪, 改名과 같은 신상관련 사항을 기재하고 있다.
구체적인 입록현황을 살펴보면, 우선 총 입록인의 수는 235명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액내 30명, 별유 190명, 액외 1명, 교생 14명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성씨별로는, 액내의 경우 李氏 7명, 朴氏 6명, 金氏 5명, 琴氏 4명, 尹氏 3명, 吳氏 2명, 柳氏 1명, 權氏 1명, 沈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별유의 경우 李氏 80명, 金氏 58명, 琴氏 15명, 朴氏 6명, 申氏 6명, 尹氏 5명, 吳氏 3명, 許氏 3명, 南氏 3명, 權氏 3명, 沈氏 2명, 柳氏 2명, 禹氏 2명, 趙氏 1명, 鄭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액외의 경우 金氏 1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교생의 경우 琴氏 3명, 金氏 3명, 沈氏 2명, 南氏 2명, 尹氏 3명, 李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위와 같이 교안의 입록인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 있다. 먼저 액내를 살펴보면, 30명이 입록되어 있다. 여기서 액내란 향교 생도의 법적 정액을 말하는 것으로 군현의 대소에 따라 차등있게 규정되어 있었다. 예안의 경우 縣으로 정원은 30명이었으며 이 정원은 교안이 작성된 18세기 후반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그리고 예안향교에서는 완의의 작성을 통해 액내와 별유로의 입록을 사족으로 한정시키고 있었다. 1661년 교안 수정 당시 작성된 「校案改修正時完議」가 그것으로 완의에서는 士族儒生 가운데 30명을 선출, 액내로 입록시키고 일정기간 액내의 역임 후 별유로 옮겨 입록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 액내와 별유 가운데서 校任을 선출토록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규정은 사족에 의한 독점적인 향교운영을 도모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 자료에서 액내, 별유의 입록우위를 보이는 성씨인 김·이·박·금·윤씨 등은 예안의 鄕案인 禮安鄕錄의 입록에서도 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다. 예안향록이 1717년까지만 작성되었기에 본 자료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이전 교안의 경우 액내, 별유 상당수가 향안에도 동시에 입록되고 있었음이 확인되며 이들 성씨들은 교안 및 향안이 작성되는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입록의 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다. 그리고 이들 성씨는 『世宗實錄地理志』와 『禮安邑誌』의 人物條에 나타난 성씨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 즉, 이들 성씨들은 예안지역에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갖추고 향안 및 교안 작성을 주도하였던 가문인 것이다.
액외와 교생에 대한 규정은 완의에서 제정된 바가 없다. 그러나 액외의 경우 신분적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87년 이전 액외의 경우 향안에 동시에 입록된 경우가 다수 발견되며 동일인이 액외, 액내, 별유를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1687년을 기점으로 향안과의 연관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교생이 액외가 되는 경우가 발견된다. 교생의 경우 향안과의 연관성이 전혀 없으며 조선후기 賤役으로 인식되던 水軍에 차정되는 자도 발견된다. 또한 기재방식에 있어서도 몇몇 교안의 경우 액외는 액내, 별유 보다 한 자 낮게, 교생은 액외보다 또 한 자 낮게 기록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러한 문서작성 방식은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선시대 문서작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는 액외와 교생이 서얼 또는 평민층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안향교에서 사족은 액내와 별유로, 서얼 및 평민층은 액외와 교생으로 입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화는 일반적인 경향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靑衿錄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상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향교진출이 이루어짐에 따라 액내의 자리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사족들은 따로이 자신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안의 경우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으며 18세기 후반까지 사족들은 액내와 별유로 입록하여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사족들이 조선후기까지 예안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1761예안향교의 교안으로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것이다. 교안을 통해 당시 예안향교의 인적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향교와 지역 사족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61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辛巳
校案
額內
朴順元
尹敬徵
尹廷龍
尹可徵
朴師錫
李重德
柳聖龜
朴守敦
金光秋
琴光魯
權尙錘
金壄
金泰翼
金英冑
李廷虎
朴師尙
沈世沆
朴師孟
李世慶
琴龍在
金應涑
朴來吉
李世英
李紳
吳命麟
吳瀗
琴友哲
琴泰玉
李棶
李貞泰
別儒
申翼龍
尹德徵
李世源
朴師天
李廷元
朴師說
金容復
金垕
金緖
李世命
柳{氵+芫}
趙鳳彬
南夏燮
李龜命
李世翊
李東馨
李震英
金應鐸
金應鑑
李世芳
金天繼
朴師尹
李廷麟
金時潤
李廷楷
金鏸
申致龍
李震燁
金天憲
禹相華
柳聖鵬
金應世
李廷采
金嶙
金杞
李世聞
李世翕
李泰源
金天授
尹遇徵
李龜宅
吳命耈
李世麟
金應淵
申正義
琴泰躋
金山斗
李宅吉
申祥龍
琴致鳳 在喪
李世劤
李龜正
李廷儁
金師舜
李世春
金龍翼
李鐸
李世直
李宗煥
琴景魯
沈世濯
金絅
李重休
尹昌徵
李世發
李國龍
金天紹
權應龍
李世權
金重玹
申正仁
李震爀
金應南
金涬
朴命新
禹繼華
琴大亨
許樞
李綸
李世鐸
李銖
金聖賛
金應濂
沈世溫
李宗燦
李世靖
金聖鍊
李鎭宅
李龜容
李世勉
李重觀
琴岐鳳 在喪
李濟萬 在喪
金重璧
李龜洛
金楨
金聖玉
金振玉
金廷玉
金楢
琴鼎錫
李銘
朴師騫
金行源
琴疇錫
李龜㱓
李鎭東 在喪
李濟元
琴聖躋
李鎔
南世龜
李濟民 改 濟龍
金斗東
金南翼
李龜報
南瑞龜
李龜叙
李龜蒙
李廷桷
李廷憲
李濟翕 在喪
李濟臣 在喪
金天經
琴哲心
申正觀
李廷翰
李世執
金安復
金垍
李學培
金天澤
金鍞
金瑞玉
李宗烈 改 祥熻
李龜禹
李鎭岳 在喪
李龜錫
吳命欽
金漢翼
金順源
李鏘
許煜
金成玉
金瑩
金良弼
李鎭慶
金樘
金英秀
琴錫魯
金瑞翼
李廷翼
琴大成 在喪
李鎭
李廷觀
李世立
金聖振
李龜福
尹祊
金達龍
權處恒
金聖臣
金聖元
琴普澤
李崇德
權重信
金應源
金{土+寬}
李廷龍
李世敬
李世益
李世徽
吳慶福
李廷吉
朴師元
許栽
金應東
李龜祿
李龜紹
李龜游
李龜明
琴宗潤
鄭光魯
琴益躋
金檍
尹成徵
李樟
李學時
金斗錬
李重直
琴宗濬

額外
金一泰
校生
琴勝德
尹德元
金鳳就
金萬宗
琴正泰
沈聃
琴運泰
金聖元
尹一運
沈孟大
尹一大
南海㱓
南賢壽
李永福
辛巳■八月日
官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