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1년 예안향교의 생도를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1751년 8월 禮安鄕校에서 작성된 校案으로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하고 있다. 예안향교에는 1620년부터 1776까지의 교안 54건이 현전하고 있으며 본 자료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교안의 작성은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대체로 일 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2월 또는 8월에 작성되었으며 생도를 종류별로 구분한 뒤 성명을 기재하고 관련사항을 기재한 후 守令의 手決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자료 또한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8월에 작성되었으며 생도를 額內, 別儒, 額外, 校生으로 구분하여 성명을 기재하였다. 그리고 이름의 하단에 故, 在喪, 移居와 같은 관련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입록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총 입록인의 수는 179명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액내 30명, 별유 142명, 액외 2명, 교생 5명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성씨별 입록은, 액내의 경우 李氏 12명, 金氏 7명, 朴氏 4명, 琴氏 3명, 南氏 2명, 尹氏 1명, 吳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별유의 경우 金氏 43명, 李氏 38명, 琴氏 18명, 朴氏 9명, 尹氏 8명, 吳氏 7명, 任氏 4명, 許氏 2명, 南氏 2명, 權氏 2명, 孫氏 2명, 柳氏 2명, 申氏 2명, 禹氏 1명, 沈氏 1명, 趙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액외의 경우 金氏 2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교생의 경우 琴氏 3명, 李氏 1명, 金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입록인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신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각 생도의 입록자격과 관련한 규정은 예안향교에서 제정한 바 있다. 1661년 「校案改修正時完議」가 그것으로 완의에서는 30명의 액내를 士族 중에서 선출하고 일정기간 액내의 역임 후 별유로 입록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 校任을 선출토록 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사족에 의한 독점적인 향교운영을 도모한 것으로 이해된다.
액내와 별유가 사족으로 채워지고 있었음은 완의의 내용 뿐만 아니라 당시 예안의 鄕案인 禮安鄕錄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예안향록이 1717년까지만 작성되었기에 본 자료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이전 시기 교안의 경우 액내, 별유의 상당수가 향안에도 입록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본 자료의 액내, 별유 입록의 우위를 보이는 성씨인 김·이·박·금·윤씨 등은 교안이 작성된 전 시기 뿐만 아니라 향안의 입록에 있어서도 꾸준한 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다. 이들 성씨는 『世宗實錄地理志』와 『禮安邑誌』의 人物條에 나타난 성씨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 즉, 이들 성씨들이 예안지역에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갖추고 향안 및 교안 작성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액외와 교생의 경우 완의에서 규정된 바는 없다. 다만 1687년 이전 액외의 경우 상당수가 향안에도 입록되고, 동일인이 액외와 액내, 그리고 별유를 옮겨 가고 있다. 즉 1687년 이전의 액외 역시 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87년 이후의 액외와 향안과의 관련성이 전혀 없고, 성씨 또한 일관성 없이 여러 성씨가 입록되고 있다. 교생의 경우 전 시기에 걸쳐 향안과의 연관성이 전혀 없으며 교생 가운데 水軍과 같은 賤役에 차정되는 자도 있었다. 또한 교안 기재에 있어서도 몇몇 교안의 경우 액외는 액내, 별유 보다 한 자 낮게, 교생은 액외보다 또 한 자 낮게 기록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는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선시대 문서작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는 액외와 교생이 서얼 또는 평민층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안향교에서 사족은 액내와 별유로, 서얼 및 평민층은 액외와 교생으로 입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화는 일반적인 경향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靑衿錄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상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광범위한 향교진출이 이루어짐에 따라 액내의 자리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사족들은 따로이 자신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안의 경우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으며 18세기 후반까지 사족들은 액내와 별유로의 입록을 통해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사족들이 조선후기까지 예안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1751년 예안향교의 교안으로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것이다. 교안을 통해 당시 예안향교의 인적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향교와 지역 사족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