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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G.1738.4717-20140630.Y142170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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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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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예안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38
형태사항 크기: 27 X 25
수량: 4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현소장처: 안동 예안향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38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본 자료는 1738예안향교에서 작성된 교안이다. 교안은 일종의 학생명부로 입록인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신분에 따른 것으로 완의의 분석과 향안과의 비교를 통해 액내와 별유는 양반사족으로, 액외와 교생은 중서층 및 상민층이 입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안향교의 생도의 분화는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은 점이다. 청금록은 향교를 출입하였던 양반사족들만의 명부로 조선후기 대부분의 지역에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이러한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고 양반사족들은 기존의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였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별유로 옮겨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일반 양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향교진출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양반사족들이 교안이 작성된 조선후기까지 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안향교의 교안은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

상세정보

1738예안향교의 생도를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1738禮安鄕校에서 작성된 校案으로 당시 향교를 출입하고 있었던 생도들의 명부이다. 예안향교에는 1620년부터 1776년까지의 교안 53건이 현전하고 있으며 본 자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교안은 조선후기 예안향교의 인적구성을 비롯하여 예안지역 士族의 동향을 확인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현전하는 예안향교의 생도안은 본 자료명인 교안 외에 儒案이라는 이름으로도 작성되었다. 일반적인 향교연구에서는 유안을 사족의 案으로, 교안을 평천민의 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두 안은 이름만 다를 뿐이며 동일안 성격의 안으로 혼용되고 있다.
예안향교의 교안은 대체로 일 년에 한 번, 2월 또는 8월에 작성되는 것이 보통이며 작성 방식 또한 대체로 유사하다. 본 교안에서는 우선 생도를 額內, 別諭, 額外, 校生으로 구분한 후 생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이름 하단에 故, 在喪 등과 같은 관련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교안의 작성 연월과 守令의 手決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작성방식은 본 교안 외에도 대체로 동일하다.
1738년 교안의 입록상황을 살펴보면 총 193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들은 다시 액내 30명, 별유 135명, 액외 5명, 교생 23명으로 나뉘어 입록되어 있다. 성씨별 입록상황을 살펴보면, 액내의 경우 金氏 12명, 李氏 4명, 琴氏 3명, 尹氏 3명, 任氏 2명, 吳氏 2명, 權氏 2명, 申氏 1명, 成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별유의 경우 金氏 39명, 李氏 36명, 琴氏 18명, 朴氏 10명, 尹氏 8명, 吳氏 6명, 任氏 4명, 南氏 5명, 成氏 2명, 申氏 2명, 柳氏 2명, 權氏 1명, 許氏 1명, 孫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액외의 경우 鄭氏 2명, 金氏 2명, 沈氏 1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교생의 경우 趙氏 6명, 琴氏 4명, 金氏 4명, 李氏 4명, 權氏 2명, 沈氏 2명, 南氏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위와 같이 1738년의 교안 입록인은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입록인의 신분에 따른 것이다. 예안향교에는 1661년 완의의 작성을 통해 이를 규정한 바 있다. 「校案改修正時完議」이 그것으로 완의에서는 유생 가운데 사족으로 액내 30명을 입록토록 하고 일정기간 액내를 역임한 후 별유로 입록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별유로의 입록 후 액내의 궐원은 신참인이 채우도록 하였다. 여기에서의 30명이라는 수는 법적 정액으로 조선시대에는 군현의 대소에 따라 향교의 정원이 정해져 있었다. 예안은 縣으로 30명이 정원이었다. 그러나 30명이라는 수는 예안의 사족을 모두 포함시키에는 태부족이었으므로 액내의 입록 후 별유로 옮겨 사족의 향교 참여를 도모한 것이다. 별유의 경우 정액은 없으며 액내를 지냈거나, 書院에 참여한 경우 입록토록 하였다. 그리고 액내 가운데 齋儒司를, 별유 가운데 掌議를 선출토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액내와 별유에 대한 규정은 사족에 의한 독점적 향교운영을 도모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 교안에서 액내와 별유입록의 우위를 보이고 있는 성씨들인 김·이·금·박·윤·오씨 등은 예안의 향안인 『禮安鄕錄』의 입록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있는 성씨들이다. 예안향록이 1717년까지만 작성되었기에 본 자료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이전의 교안의 경우 액내·별유 상당수가 향안에 중복 입록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들 성씨는 『世宗實錄地理志』와 『禮安邑誌』의 人物條에 나타난 성씨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성씨들이 예안지역에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갖추고 교안의 입록과 향안 작성을 주도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완의에서 액외와 교생에 대해 규정된 바는 없다. 그러나 액외의 경우 시기별로 입록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1687년 이전의 경우 액외 입록인 또한 향안에 입록된 경우가 많으며 동일인이 액내, 별유, 액외를 이동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즉 액외 또한 사족으로 구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87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액외 입록인과 향안과의 연관성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며 성씨 또한 일관성 없이 여러 성씨가 입록되고 있다. 교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 1737년 작성된 교안에서는 교생 입록인이 水軍으로 充定되었음이 확인된다. 당시 수군은 賤役으로 인식되던 직역으로, 교생이 수군으로 충정되었다는 것은 곧 교생의 신분 역시 평천민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작성방식에서도 차이점이 발견된다. 몇 몇 교안의 경우 액외는 액내와 별유보다 한 자 낮게 내려쓰고 교생은 액외보다 또 한 자 낮게 기록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는 신분에 따른 기록의 차이로 조선시대 문서 작성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예안향교의 액외와 교생은 중서층 또는 상민층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향교내 사족과 비사족층의 분화는 일반적인 것으로 예안향교 또한 입록인의 신분에 따라 분화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예안의 경우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靑衿錄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상민층의 지위가 점차 상승하고 군역면제와 신분상승을 위한 향교 진출이 점차 일반화되었다. 비사족층의 광범위한 향교 진출이라는 상황 하에서 사족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 액내의 자리를 내어주고 따로이 자신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예안의 경우 이러한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으며 교안의 작성되는 18세기 후반까지 액내교생을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액내의 입록 후 별유로의 입록을 통해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이는 곧 예안의 사족들이 조선후기까지 예안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1738예안향교의 교안으로 당시 향교를 출입하던 생도를 기록한 것으로 교안을 통해 당시 예안향교의 인적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향교와 지역 사족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38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戊午八月初七日
〔丁巳〕年(?)
校案
額內
申鎭
任灝
吳澈 在喪
尹赫周
李聃龍
李台進
金麒錫
金鍊
金圭錫
李守恒
金崇重
金廷柱
琴思義
琴思起
尹鳴周
金道重
金㵓
權國楨
琴萬調
金貞元
任潽
李春茂
尹從周
權顯經
金德元
吳沆
成夙寅
金楚重
金時燮
金施浹
別儒
琴景遠
琴友夔 在喪
金道元
李厚兼
李世泰
琴命典
南明燮
金若鎰
南廷燮
金若天
李世輔
孫元顯
李仁赫
尹藩周
尹齊說
金師閔
金一元 在喪
金重岱
琴思訥
尹贊周
吳涉
任湜
金亨復
尹齊聖
金若欽
朴再實
李世德
李國範 在喪
金履元
琴友益
李運泰
金鉍
吳▣大
李台綱
李成泰
琴赫
申欽
申載巘
金東益
金信元
任瑞雲
金鼎燮
李世皥
金震遠
李守元
成宅寅
李守恬
朴再皥
李台三
金東遠
金應龜
琴光澤
李世龍
南宗燮
金績
金師顔
金重崙
李泰馨 在喪
李世浹
李建彬
尹命周
琴友咸
朴再荃
金恒復
朴師敦
朴師勛
許潝
李廷烈
琴恊
李猶龍
金仁復
朴昌勛
李復馨
李廷楫
吳漢
金天應
權國賓
琴友卨
柳龍章
琴命寅
琴衡在
琴友箎
柳{氵+寬}
李廷杰
李廷楝
金師述
金東烈
李克泰
南周燮
李世徵
李國詹 在喪
金應千
李守方
琴龍翼
李益馨
朴師華
李塙
南弘燮
李陸
李守㝎
李春溥
金東稷
尹就徵
金師文
李世憲
金師龍
朴師莘
任{氵+兄}
金泰復
朴龍翰
琴正魯
朴師淵
任道大
尹齊龍
金元錫
琴恒在
金春元
金錫
琴錫泰
李春英
李均
金師夔
金統
金墩
金天杰
金英烈
吳命泰
吳漸
金冑翼
尹齊夔
吳命觀
成汲
李{山+在}
琴友鍾
金光復
額外
鄭壽恒
鄭希泰
金一秋
沈楫
金光瑞
校生
趙{氵+甲}
琴尙翕
趙命新
李宗茂
金聖杰
趙灝
南聃㱓
琴載泰
琴師武
李世天
沈望逸
金瑞圖
琴運泰
趙(洅)
李渾
金德昌
金模
權翼龍
權羽龍
趙淵
趙洽
李海春
沈喜雨

戊午八月初七日
縣監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