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년(1730)에 작성된 시향록으로 풍기지역을 면별로 나누어 향안의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인명과 자호, 생년간지를 순서대로 기입하고 있음
자료의 내용
1730년에 작성된 時鄕錄이다. 입록되어 있는 인물들의 양상이나 풍기향교에 소장된 여타의 고문서 중 향안이나 교생안, 선생안 등과 중첩되는 인물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향안과 같은 성격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뿐만 아니라 기재 형식 등을 통해서도 향안의 내용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향안이란 일종의 鄕紳錄으로서, 그 지방에 있는 유력인사, 즉 鄕大夫, 士들로서 品藻가 뛰어난 이들을 選錄한 것을 말한다. 현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관리의 銓注에 참고로 하는 중앙의 政案과 같이 세족, 顯族, 右族 등으로 불리우는 향중사류들의 명부임을 알 수 있다. 향중사류란 품관, 즉 유향품관으로서 고려 말 각종 軍功으로 첨설직을 받았던 중앙관인群이 조선건국과 함께 대거 귀향조치가 단행되자, 본관지에 세거하면서 견고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함과 동시에 그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 나간 계층을 말한다. 재지지주로서 강한 토호적 성격을 띄게 되는 이들은 재지사족, 혹은 土姓兩班들로서 一鄕의 기강확립과 민속 교화를 담당하는 세족으로 발전해 나갔는데 ‘세족’이란 문벌과 地閥을 갖춘 사족이란 의미로, 여기에는 토성에서 상경종사하였다가 낙향한 가문, 토성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가문, 타지역 출신으로 이주하여 벼슬, 학문, 덕행을 갖춘 가문들로서 이들이 바로 향안에 입록될 수 있는 계층들이었다.
본 문서는 1730년에 작성된 것으로 18세기 초, 중반의 풍기지역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향록에 기록된 것은 이름과 字號, 생년간지뿐이라 작성의 이유나 배경 등에 관한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당시 향안 작성의 형식의 틀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향원의 명부를 지역별로 구분하여 작성하고자 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겠다. 이보다 앞서 작성된 시향록과 마찬가지로 풍기를 지역별로 구분하여 총 12개 지역 113명의 향원을 인명과 자호, 생년간지를 연령순으로 기록하고 있는 양식으로 작성되었다. 가장 많은 입록자가 있는 지역은 西部와 大龍山 지역으로 각각 16명이 등재되어 있고, 이어 東元 14명, 大平 10명, 浮石·牲峴·奴佐里 각 9명, 東村·內竹 각 8명, 道干 7명, 臥龍 5명, 殷豊 2명 순이다. 6년전 시향록보다 총원에 있어 44명이 감소하였는데, 간간히 기록된 사항을 통해서 이거된 인원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약 25% 정도의 인원 변동에 대한 대강의 사항이 타지역으로의 이거에 의한 것인지, 자연적 감소에 의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전 지역에 걸쳐 인원이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서부의 향원은 절반수준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초반에 작성된 문서로 향안과 같은 양식으로 작성되었는데, 지역별로 구분하여 향원의 인명과 기초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풍기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여타의 면분류 형식의 문서와 비교하여 시기별로 향안 입록자의 추이와 풍기지역 내에서의 재지사족의 거주양상을 비교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면분류로 작성된 총 8건의 문서가 대부분 18세기 초, 중반에 집중되어 있어 짧은 기간이지만 비교적 상세히 입록자의 경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90
『大丘史學』第 26輯, 申正熙,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安東文化硏究』5, 정진영, 안동문화연구회, 1991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