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본 자료는 1722년 2월, 예안향교의 교안이다. 교안은 당시 향교에 출입하였던 인사들을 기록한 것으로 총 144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교안에 기록된 이들은 다시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신분에 따른 것으로 예안향록과 같은 다른 자료와 비교해 보았을 액내와 별유는 양반사족으로, 액외와 교생은 일반 평민층으로 입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안향교의 교안은 다른 지역의 교안 작성방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은 점이다. 청금록은 향교에 출입하였던 양반사족들만의 명부로 조선후기 대부분의 향교에서 작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청금록 작성 이전 양반사족들은 액내교생으로 향교에 입교하고 있었다. 액내교생은 정액내의 교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군역면제와 같은 각종 특혜가 있었기에 군현의 대소에 따라 그 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점차 중서층을 비롯한 상층양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고 이들의 향교진출이 활발해져 감과 동시에 무자격 교생을 도태시키기 위한 중앙정부의 교생 통제책이 실시되자 양반사족들은 더 이상 액내교생으로의 입교를 회피하였다. 그러나 사족들은 교생으로의 입교를 회피하였을 뿐 향교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향교는 유일한 관학이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유학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족들은 따로이 그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 스스로 청금유생이라 칭하며 지속적으로 향교에 출입하였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이러한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고 양반사족들은 기존의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였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별유로 옮겨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일반 양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향교진출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양반사족들이 교안이 작성된 조선후기까지 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안향교의 교안은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