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년 예안향교(禮安鄕校) 교안(校案)
본 자료는 1721년 2월, 예안향교에서 작성된 교안이다. 교안은 조선시대 향교에 출입하였던 생도를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학생명부라 할 수 있다.
교안에는 총 144명이 기록되어 있고 이들은 다시 액내, 별유, 액외, 교생으로 구분되어져 있으며, 이들 가운데 액내와 별유는 양반으로, 액외와 교생은 일반 양민층으로 구분되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안향교 교안은 일반적인 교안 작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은 것이다. 청금록은 향교에 출입하였던 양반사족들만의 명부로 조선후기 대부분의 향교에서 작성되었다. 청금록의 작성은 당시의 시대상과 관계가 깊다. 조선시대 향교의 교생에게는 군역의 면제, 무상교육, 하급관리로의 진출 기회 부여 등과 같은 각종 특혜가 주어졌고 고을의 대소에 따라 교생 수에 제한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정원내의 교생을 액내교생이라 하였고, 조선후기 이전 양반사족들은 액내교생으로 입교하여 향교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 이외에 일반 양민층은 액외교생으로 입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교생의 특혜를 누림과 동시에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하고자 하는 상층양민의 향교진출이 활발해지고 정부에 의한 일괄적인 교생 통제책이 실시되자 양반사족들은 더 이상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지 않고 그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 지속적으로 향교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액내와 액외는 양민층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안향교의 경우 이러한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고 양반사족들은 기존의 액내교생으로 입록하였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별유로 옮겨 향교에 지속적으로 출입하였다. 일반 양민층의 지위가 상승하고 그들의 향교진출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예안의 양반사족들이 교안이 작성된 조선후기까지 향교를 강력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안향교의 교안은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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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안동문화연구』5, 鄭震英, 安東文化硏究會, 1991
1차 작성자 : 유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