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진년(1700)년부터 정미년(1727)까지 작성된 원임안으로 순흥지역의 향원의 인명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기록
자료의 내용
庚辰년(1700)년부터 丁未년(1727)까지 작성된 원임안으로 순흥의 鄕員의 인명을 동북면과 서남면의 지역별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원임안의 성격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입록된 이들의 면면을 통해 일종의 鄕案의 형식과 성격을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 순흥지역을 크게 동북과 서남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순흥의 원래 행정구역은 대평, 내죽, 부석, 동원, 도강, 화천 등인데, 동북과 서남 두 구역을 통칭하여 기입한 것은 실질적인 坊曲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구분획정에 의한 기록으로 보인다. 이는 순흥향교 소장 ‘校中雜錄’과 ‘通文’에 보이는 것과 같이 순흥이 府로 복설되고 난 뒤 쉽게 해결되지 못했던 행정구역의 재편의 사정이 어느 정도 반영된 시기에 작성된 것과 상통한다. 단종복위운동의 중심지였던 순흥은 그로인해 풍기, 영주, 봉화 등지에 분할예속되었으며 1683년에 이르러서야 옛 고을을 회복하였고, 인근의 수령들과 복설과 관련된 옛 경계 회복에 관한 논의도 이뤄졌으나 쉽게 해결되지 못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향교에 소장된 자료 중 순흥 복설 초기의 문서에는 순흥의 지역구분이 그 당시의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내용은 인명과 字號, 출생간지를 나이 순으로 기록한 것으로 여타의 향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진년에 동북면 60명, 서남면 23명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갑오년(1714) 이후부터는 수시로 적은 인원이 追錄되고 있다. 대개의 추록 시기가 춘추의 향사 시기와 비슷하여 향중의 논의를 통해 추록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입록된 이들의 대부분이 순흥향교 향사의 임원의 명부인 《집사안》에도 입록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집사안에 등장하는 성씨와는 달리 본 문서에 등장하는 성씨는 총 13개로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추록된 인물을 제외하고, 작성연대를 명확하게 구분지어 1700년에 입록된 인원은 총 83명으로 李氏가 19명으로 가장 많고 黃氏, 金氏, 朴氏 순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집사안에는 총 31개의 성씨가 입록되어 있으며 이씨가 가장 많은 47명, 김씨가 36명, 권씨가 26명 순이다. 순흥에는 土姓으로 申, 安, 李, 尹, 石과 來姓인 金, 鄭이 있었다. 그러다 端宗復位運動의 좌절됨에 따라 순흥의 재지 사족은 크게 위축되었고, 순흥부는 혁파되었다. 그로인해 순흥은 특정의 지배성씨가 형성되지 못하고 다양한 성씨로 향촌사회가 구성되게 되었다. 다양한 성씨와 성관은 1683년 순흥이 府로써 복설되는 시점부터 향촌지배 세력으로 비로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官衙와 鄕校 등의 창건과 重建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향촌지배세력으로서의 결집을 노력하고 있었고 향교의 享祀 주관, 본 문서와 같은 面別의 향안이라고 보이는 原任錄의 작성 등이 그러한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집사안에 등재된 인물들은 당시 순흥의 향촌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사족층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향교가 반드시 사족의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향교의 향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사족층만이 아닌 향교에 참여할 수 있는, 또는 향교에 참여하고 있던 인물들이 총망라된 것이기 때문이다. 순흥의 在地士族은 사족 자신들의 案을 만들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이 原任案이다. 이 같은 원임안은 순흥이 부로서 복설되는 시점부터 작성되고 있는데, 추록되는 것이 1714년임을 통해 그 시간을 상정할 수 있다. 이후에는 다른 군현의 향안과 마찬가지로 계속적인 追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문서에 등재된 인물의 성씨는 다름 아닌 순흥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성씨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순흥향교 소장 《任仕案》을 통해서도 향교의 교임을 주로 담당한 성씨이라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한편 추록되는 인물들의 성씨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714년을 시작으로 추록이 되고 있는데, 추록의 횟수와 인명은 총 17회 33명인데, 집사안과 원임안의 인원 수 상위 성씨 李, 黃, 金, 朴 등이 19명으로 절반이 넘는 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들을 중심으로 18세기 초기의 순흥의 향촌사회의 지배체제가 정립되고 있었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자료적 가치
일종의 鄕案의 형식과 성격을 갖춘 것으로 사족 자신들의 案을 만들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를 모색하고 따로 작성된 자료이다. 순흥의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성씨들로 구성되어 있는 본 문서는 순흥향교에 현전하는 다른 문서와 함께 향교 운영에 있어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중첩되고 있으며, 그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향촌사회를 재구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