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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 교생안(校生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G.0000.4776-20140630.Y14113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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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영양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형태사항 크기: 26 X 27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안내정보

17세기 후반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 교생안(校生案)
17세기 후반 작성된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의 교생안(校生案)이다. 교생안은 향교에 등록된 학생의 명부라 할 수 있다. 본 교생안에는 64명의 교생이 확인되는데, 성씨별로는 김씨(金氏) 15명, 이씨(李氏) 8명, 조씨(趙氏) 8명, 남씨(南氏) 6명, 구씨(具氏) 5명, 권씨(權氏) 3명, 신씨(申氏) 3명, 안씨(安氏) 3명, 오씨(吳氏) 3명, 전씨(田氏) 3명, 정씨(鄭氏) 3명, 문씨(文氏) 1명, 박씨(朴氏) 1명, 장씨(張氏) 1명, 홍씨(洪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성관은 영양김씨(英陽金氏), 김녕김씨(金寧金氏), 재령이씨(載寧李氏), 한양조씨(漢陽趙氏), 영양남씨(英陽南氏), 능성구씨(綾城具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순흥안씨(順興安氏) 등으로, 17세기 후반 영양현 지역의 여론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재지사족 가문들이다.
한편, 향교 학생 명부의 경우 조선후기로 접어들게 되면, 명칭의 분화가 많이 이루어진다. 학문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피역(避役)이나 신분 상승의 목적으로 투속된 사족 이하의 계층이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기존의 사족들은 교생안에서 이탈하여 자신들만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 유안(儒案) 등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작성된 본 교안은 전통적인 사족의 명부인 청금록과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영양현이 독립된 고을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영양향교도 이 무렵 건립되었던 까닭에, 아직 신분적인 문제와 피역의 문제로 인한 교생안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세기 후반 慶尙道 英陽縣 소재 英陽鄕校에 소속되어 있던 校生 64명의 명부
자료의 내용
慶尙道 英陽縣 소재 英陽鄕校에 소속된 校生들의 명부인 校生案이다. 작성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입록자의 생몰연대를 감안할 때 영양현에 수령이 파견되고 향교가 건립된 지 얼마 후인 17세기 후반의 교생안으로 추정된다. 교생안에는 교생들의 성명만 기재되어 있으며, 성명 하단부에는 ‘故 ’, ‘講案’, ‘移’, ‘官’, 또는 개명한 성명 등의 세주가 확인되는데, 후대의 어느 시점에 교생의 현황을 파악하면서 명기해 놓은 것이다. 모두 64명의 교생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削籍 흔적이 모두 일곱 군데서 나타난다. 후대에 어떠한 사유로 몇몇 인사가 교생안에서 제외된 듯하다.
교생안 입록자 64명은 성씨별 분류가 가능한데, 이를 나열하면 金氏 15명, 李氏 8명, 趙氏 8명, 南氏 6명, 具氏 5명, 權氏 3명, 申氏 3명, 安氏 3명, 吳氏 3명, 田氏 3명, 鄭氏 3명, 文氏 1명, 朴氏 1명, 張氏 1명, 洪氏 1명 순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영양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과 향교의 사회적 지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먼저 교생안에서 확인되는 64명의 인사는 17세기 후반 영양현이 독립할 당시 지역 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가문 출신들이다. 이들의 姓貫은 英陽金氏, 金寧金氏, 載寧李氏, 漢陽趙氏, 英陽南氏, 綾城具氏, 安東權氏, 順興安氏 등인데, 이들은 향교 교생으로 참여하며, 지역 내 재지사족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 교생안은 향촌 내 지위와 관련하여 분화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향교에 투탁하여 避役과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고, 이는 곧 기존 사족들이 교생안에서 이탈하여 별도의 명부를 작성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고을마다, 그리고 시기별로 차이가 있으나 기존 교생안에서 이탈한 사족들은 보통 靑衿錄,儒生案,儒案 등이라 불리는 별도의 명부를 작성했던 것이며, 흔히 교생안이라 하면 정원 외에 투탁의 목적으로 입록된 額外校生이나 지위가 낮은 西齋校生을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재 같은 ‘校生案’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나, 18~19세기의 영양향교 교생안은 본 교생안과는 달리 서재 교생의 명부로 확인되고 있다. 반면, 본 교생안의 경우 흔히 靑衿錄, 儒案이라 불리는 전통적인 재지사족의 교생 명부라고 볼 수 있다. 본 교생안이 작성되는 시점은 영양향교 건립 직후인 관계로, 신분이나 피역의 문제로 교생안의 분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세기 후반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 교생안(校生案)
校生案

李煥亨【故】
趙蘋【年滿故】
吳英錫【故】
李燦亨【先】
南天楨【故】
李煌亨【故】
趙顙【故】
權道衡【官任故】
南天標【枸故】
趙壽萬【移故】
李東直【講案】

南樞星【移故】
具伉【講案年滿】
具倫【年滿】
趙▣億【▣…】
安世昌【▣…】
趙壽星【移】
田有起【先年滿】
具佑【官】
南天紀
吳萬標
■■■【講案】
安世榮【先年滿】
金遇聲【故】
趙壽弼【官】

金振樞【講案】
趙壽彦【移】
金希宗
■■■【講案】
■■■
李載厚【▣…】
金有榘【▣▣▣】
張縈【移】
■■■
趙碩達【官】
■■■
金敬秋【改慶秋】
金以松【改以聲】
金雄瑞【改以鍊講案】
吳聖昌【改仲方】

具鉉三【座▣】
■■■
李盛葉
鄭泰齊【官】
鄭泰賢
金泰宗【改胤光改秀光講案】
田雲望【改世華官】
具仁三【講案】
■■■【▣▣】
權怘【講案】
田世雄【官】
金世標【講案】
金以鍊【▣出講案】
朴增奎【講案官】
南鵬圖
南世榮【講案官】
安處精【講案】

洪道宗【講移】
金始英【講案】
■■■【講案】
金如錫【講案】
李始馣【改世馣講案】
李萬實【移】
申命賢【願納官】
鄭萬京【改時郁】
申邦標【講案】
文世普
申命契
權必壽
金時達
金時鐸【故】
金後鍾唐下